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장식이가 청주시 인민위원장이 됐다며?"
"아니랴."
"그럼 뭔데?"
"글쎄. 무슨 당 위원장이라나 뭐라나."
마을 노인네들이 마을 청년 신장식이 출세해 청주에서 높은 사람이 됐다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누구도 확실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당시 청원군 강서면 원평리 1구는 그만큼 시골이었다.
노인들의 뒷담화가 있은 지 며칠 후, 그 마을에 쌍권총을 찬 이가 나타났다. "어이구, 이게 누구여. 장식이 아닌감." '큼' 하는 경호원인 듯한 청년의 눈짓에 먼저 아는 척했던 이의 목이 자라목이 되었다. "잘 지냈는가, 정 동무." 정아무개는 몇 년 만에 보는 친구 신장식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의 말투도 달라졌지만, 그의 뒤편에는 3~4명의 경호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장식이 원평리에 도착한 때는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절이었다. 인공 시절 신장식은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당은 행정기관보다 우위에 있었다. 즉, 현재의 청주시장 격인 청주시 인민위원장보다 높은 위치였던 것이다.
간이학교 출신의 빨치산
그렇다면 원평 간이학교 졸업이 가방끈의 전부였던 그가 어떻게 청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됐을까? 간이학교는 일제강점기에 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조선인 아동에게 초등 교육 과정을 2년 만에 마치도록 한 보통학교 부설 속성 초등학교를 이르던 말이다.
신장식은 해방 후부터 좌익 활동을 했다. 정확한 활동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면서 마을 청·장년들을 조직했다고 한다. 원평 2구 정진문(1934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후 신장식이 동네 사람들을 빨치산 투쟁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장식이 한국전쟁 전에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일까? <충북지역전사>에는 그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몇 차례 나온다.
"이때 충청북도에서는 북괴군 장성 출신 윤상철과 중앙정치지도원 신장식이 주축이 되어 충북도당을 제3지구당 소지구당으로 개편하고,
청원군 낭성면 출신 신장식을 재교육시켜 제4지구당(일명 생산유격대: 좌익분자 포섭 및 조직확산 임무)을 조직하여, 비무장으로 남파한 후 보은군 속리산에 거점을 확보하고, 동조자를 규합을 위해 청원군, 괴산군 일대를 무대로 하여 조직확산에 나섰다(충청북도통합방위협의회·제37보병사단, <충북지역전사>, 2000).
위의 '청원군 낭성면 출신'은 청원군 강서면 출신의 오기인 듯하다. 낭성면의 좌익 활동가는 귀래리의 신형식뿐이고, <충북지역전사>의 다른 표현을 보면 신장식이 강서면 원평리 출신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장식은 한국전쟁 전 청주·청원 지역 빨치산 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전쟁 전 신장식 패거리들은 청원군 강서면 내곡초등학교 교사 이◯◯(문암리)를 살해했는데, 이는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직전 신장식은 경찰에 검거되어 청주형무소에 구속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대문형무소 감방문이 인민군에 의해 개방되었다. 신장식은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 청주로 내려왔다. 그의 전쟁 전 활동 이력으로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이 된 것이다(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청주시 관공서 서류, 1950).

▲신장식청주시당 위원장 신장식이 청주시 인민위원장에게 보낸 공문 ⓒ National Archives and Rec
토지개혁과 의용군 동원
"정상모 동무의 밭을 몰수합니다."
원평 2구 정상모는 자신의 밭 2필지가 토지개혁 대상이 되자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했다. 하지만 불평불만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나마 논 12마지기(2400평, 7920㎡)를 뺏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다.
옆 마을인 원평 1구 정관모는 논과 밭 상당수를 무상으로 몰수당했다. 원평리 인민위원회는 무상 몰수한 땅을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과 머슴에게 분배했다.
인공시절 주민들이 가장 불안에 떨었던 것은 의용군 모집이었다. 일부 청년 중에는 자원한 이도 있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의용군 가는 것을 주저했다. 낙동강에서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의용군은 총알받이가 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원평리에서도 의용군 모집이 시작되었다. 자발적인 의지보다는 마을별 할당이 크게 작용했다. 약 20명이 모집되었으며, 청년들은 강서초등학교 옆 솔밭(능무릉이 산)에서 약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원평리 주민들은 자식들에게 된장과 고추장, 장떡을 갖다 주었다.
솔밭에서 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전선에 투입됐다. 약 20명이 끌려가서 중간에 도망치거나 포로수용소에 억류됐다가 집으로 돌아온 이는 1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끝내 소식이 없었다.
주민들이 장떡을 만드는 것은 자식들이 의용군에 갈 때만이 아니었다. 인민위원회와 마을을 경유해 전선으로 가거나 백두대간을 통해 북상(혹은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바치기 위해서도 장떡을 만들어야 했다.
"집집마다 한 명씩 오후 8시까지 나오시오!"
인민위원장의 지시를 받은 반장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손나팔을 불며 외쳤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부역이구만."
"쉿! 들릴라."
1950년 여름 내내 원평리 주민들은 부역에 동원되었다. 특히 그해 8월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미군이 폭격을 하면서 툭하면 도로 복구니, 다리 복구니 하면서 주민들을 동원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 입이 한 뼘이나 나온 날은 강서에서 조치원 방향의 강외면 철교를 복구하는 일이 있는 날이었다. 미군이 낮에 폭격하면, 인민위원회에서는 밤에 복구하는 일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했다.

▲토지개혁 공작원 모집토지개혁 공작원 모집에 관한 공문 ⓒ National Archives and Rec
사촌 형의 신고와 검거 시도
짧은 인공 시절을 뒤로 하고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했다. 밤에 몇 차례 경호원을 데리고 원평리로 오던 신장식의 소식도 끊겼다. 청주시 인민위원회와 민청에서 일했던 신장식의 형들도 소식이 끊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장식이 상복을 입고 마을에 나타났다. 검거령을 피해 위장을 한 것이다. 며칠 후에도 신장식은 무리를 지어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누구도 신고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신장식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접한 경찰들은 마을 주민들을 괴롭혔다. 신장식의 얼굴을 본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 청·장년 대다수가 강서지서로 끌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몰매를 맞는 것은 보통이었고, 고문까지 당해야 했다.
그날은 신장식 일행 10여 명이 이장 집에 머무른 날이었다 . 병풍 뒤에 숨어 있던 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때였다. "꼼짝 마!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신장식 일행은 방 뒷문을 걷어차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황급한 경찰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참을 쏘았다고 생각한 경찰들은 나중에야 자신들이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 총기의 안전장치를 풀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하는 소리가 콩 볶듯 했지만 때는 늦었다.
신장식 일행은 상신리 방향으로 도망쳤다. 상신리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교전 과정에서 신장식 일행 한 명이 체포되었다. 뒷날 밝혀진 일이지만, 이날 경찰에게 신장식 일행을 신고한 이는 그의 사촌 형 신◯식이었다.
그렇다면 신◯식은 왜 사촌 동생을 신고했을까? 포상금이 탐나서 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신◯식은 인공시절 강서분주소장(강서지서장)이었다. 즉, 부역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국군 수복 후 경찰에 자수했다. 경찰은 그가 신장식의 사촌 형임을 알고, 채찍보다 당근을 내밀었다.
"네 사촌 동생을 신고하면 네 죗값을 없애 주겠다." 신◯식은 고민했다. 자신의 인공시절의 행적을 생각하면 중죄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사촌 동생을 신고하는 것도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감옥 생활을 견디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고민하던 그에게 경찰은 감언이설로 달랬다. "당신이 신고하면 신장식의 목숨은 살려주겠소." 경찰의 말을 순순히 믿은 그는, 사촌 동생이 이장 집에 왔다고 신고했다. 경찰들이 번개같이 출동해 이장 집을 포위했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이번에는 신장식과 그 일행이 신◯식 제거를 위해 마을에 나타났다. 신◯식은 사촌 동생을 신고한 후 마을에 있을 수 없었다. 덕분에 그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신장식 검거를 둘러싸고 강서면 원평리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인공시절 인민위원회와 민청 간부였던 신장식의 친형들은 행방불명이었다. 신장식의 동생은 원평리 옆 마을인 상신리 산자락에 굴을 파고 숨어 있었지만,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굴을 나온 신장식의 동생은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의 자존심과 청주의 마지막 빨치산의 최후
경찰들이 신장식을 검거하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장식이 인공 시절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1년 5월 26일 남부군이 청주시를 습격할 때 길 안내를 맡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1950년 겨울 난리 이후, 일개 도의 도청 소재지가 빨치산에 의해 일시적으로나마 점령된 것은 청주가 유일했다.
'청주시 습격 사건'은 국회에서도 논란이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치안 관계 기관인 경찰로서는 신장식 검거에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어차피 습격의 주체인 남부군은 지리산에 또아리를 틀고 활동하고 있었기에, 청주 경찰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러니 길 안내를 맡고 지하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신장식을 검거하는 일은 청주 경찰로서는 운명을 건 일이었다. 청주경찰서는 역공작을 통해 신장식을 검거하려 했다. 청주 교동초등학교에서 신장식 일행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신장식 일행을 에워싼 경찰이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탕' 이번에는 간부의 신호가 없었는데, 청주경찰서 사찰과 김◯◯이 총을 쏜 것이다. 신장식과 일행은 부리나케 몸을 피했다. 경찰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쫓고 쫓기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된 후였다. 신장식이 강서면 문암리 참외밭 원두막에 있을 때였다. 농사꾼으로 위장한 지게를 진 이들부터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원두막에서 20m 가까이 접근했을 때, 권총을 쥔 간부의 손이 움직였다. '탕' 하는 소리에 경찰들의 집중 사격이 이어졌다. 신장식이 날랜 동작으로 원두막에서 뛰어내리는 찰나,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무릎이 꺾였다. 다시 일어서려는 그에게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신장식을 에워싼 경찰은 현장에서 담가를 만들었다.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담가에 실린 신장식은 경찰차에 태워져 도립병원(현재의 청주의료원)으로 향했다. 치료를 받던 중 신장식은 사망했다. 1953년 6월이었다. 청주의 마지막 빨치산, 신장식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