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에서는 정신 질환을 가진 범죄자들이 중범죄를 저지른 뒤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국가 복지 지원을 유지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가해자가 왜 보호 받아야 하느냐"는 비판을, 전문가 집단은 사회 안전을 위해 최소한의 지원은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 .
나는 이 같은 논쟁을 접하며 조은혜의 <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2025년 8월 출간)를 떠올렸다. 이 책은 정신전문간호사이자 범죄심리사로 교도소 심리치료과에서 일하는 저자가 교정 현장에서 만난 정신질환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표지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 책 표지 ⓒ 책과이음
저자는 '환자이면서 동시에 범죄자인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론과 매뉴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부딪혔다고 고백한다. 책의 첫 에피소드인 '자라지 못한 모성'에 등장하는 박은수는 지적장애를 지닌 채 십 대 시절의 성폭력, 원가족의 부재, 폭력적인 남편, 이해력의 한계가 겹겹이 얽혀 있는 인물이다.
p. 42~51
박은수는 둔한 몸을 이끌고 쭈뼛쭈뼛 상담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 허망했다. '교도소'라는 곳이 무서워서 주눅이 든다고 말한 그녀는 아이와 관련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삼촌이 보고 싶다며 무작정 울었다.
(중략)
박은수는 같은 말을 천천히 여러 차례 반복하고 설명해줘야 할 만큼 이해력이 부족했다... 그랬다. 박은수는 지적 장애자였다. 그런데 어떤 범죄 사건이 정신 질환과 관련이 있을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그 사실을 강조해 언급해 오던 언론에서 이번엔 왜 박은수의 지능 수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내뱉지 않았을까... '가해자의 서사'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슬로건은 범죄자의 개인사가 사건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의미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나로서는 이 구호가 목에 걸렸다. 마치 사회 정의 실현에 반동적인 행위를 하는 악의 동조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박은수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서사를 대면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자는 박은수의 지능 수준이나 삶의 맥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언론이 자극적인 범죄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안타까워한다. 물론 그녀가 자라난 환경이 그렇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만큼은 우리 사회가 외면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묻는다.
저자는 '당신의 감정은 옳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오은지를 통해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p. 118
상담하는 동안 그녀가 울지 않은 날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울음의 세기와 강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알아차리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연습은 그녀의 평생 숙제가 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마음껏 슬퍼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 아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대해서, 몇 년간 기른 아이를 잃은 슬픔에 대해서. 그리고 마음껏 분노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결혼에 대한 최소한 책임도 지지 않는 남편에 대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에게 몹쓸 말을 한 시어머니에 대해서. (중략)
존중 받지 못한 감정이 극단의 공격성을 야기할 수도 있는 우울증이 될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 가해자는 없다. 단지, 감정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의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존중 받지 못한 채, 비난 속에서 술로 슬픔을 감추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녀가 존중 받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우울이 되어 쌓이고 왜곡되다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 문제로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비극으로 번지기 전에, 술 대신 위로를 건넬 단 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작은 다름이 그녀가 맞닥뜨린 비극의 방향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저자는 묻는다. 이때 누군가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서 가해자의 환경을 말하는 순간,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경고일 것이다.
저자는 그들이 지은 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범죄가 주어진 환경 때문에 벌어졌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묻는다. 누구라도 자신을 지켜줄 어떤 안전망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타인을 파괴하는 방식으로라도 자신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리지 않는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최근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결국 이 질문으로 귀결된다. 처벌과 복지, 책임과 치료의 경계에서 우리는 어디에 설 것인가. <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는 이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교도소라는 높고 단단한 벽 안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쉽게 단정해왔던 판단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범죄를 미화하지도, 죄를 지우지도 않으면서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 높고 낯선 담장 안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신질환 범죄자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균열을 직시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