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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가득한 작업실에서 권오복 명인이 코가 큰 ‘코쟁이’ 인형을 정성스레 조각하고 있다. ⓒ 진재중
하얀 먼지가 눈처럼 내려앉은 작업실, 나무를 깎는 공구 소리가 쉼 없이 공간을 채운다. 마스크 위로 눈만 내민 채 한 남자가 묵묵히 나무와 씨름한다. 칼끝이 스치는 자리마다 거친 나뭇결 속에서 새로운 얼굴이 드러난다. 유난히 코가 큰 목각 인형들. 작업실은 마치 '코 크기 자랑'이라도 하듯 큼지막한 코를 가진 인형들로 가득하다.
50여 년 동안 그는 같은 자리에서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문지르며 사람의 얼굴을 빚어왔다. 거친 나뭇결에서 표정을 찾아내고, 큼직한 코에 웃음과 해학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담아 넣는다. 손끝에 켜켜이 쌓인 세월은 그대로 인형의 얼굴이 된다. 봄비가 내리던 3월 3일, 나무 향 가득한 작업실에서 목각 인형 장인을 만났다.
코에서 시작되는 생명

▲‘2026년 3월 3일, 2722번째 작업’이라고 새겨진 채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목각 인형이 작업대 위에 놓여 있다. ⓒ 진재중
작업대 위에는 마치 해부된 신체처럼 조각난 나무 형체들이 놓여 있다. 아직 얼굴이 되지 못한 나무토막, 막 다듬기 시작한 다리, 형태를 갖춰가는 손. 그는 얼굴을 먼저 만들고 이어 다리와 손을 깎아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부분은 '코'다. 칼끝이 오가는 만큼 코에는 표정과 성격이 깃든단다.
작업실 안은 드릴 소리와 나무 가루로 가득하다. 기계음에 몰두한 그는 방문객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다. 한참 뒤 기계가 멈추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코가 참 잘 생겼습니다."
권오복(67세) 작가의 첫 인사다. 그는 얼굴에서 코를 제일 먼저 본다. 그의 세계에서 코는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얼굴의 중심이자 인형의 생명이며, 어쩌면 자신을 닮은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긴 코가 빚어낸 또 하나의 세계

▲버려진 폐목재를 다듬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완성한 목각 인형들이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 진재중
강릉 노암동의 막국숫집 겸 전시장에는 나무의 은은한 향이 감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긴 코를 지닌 목각 인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굴과 표정은 모두 다르지만,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언제나 도드라진 코다.
공간을 가득 채운 인형들은 수줍게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당당히 서서 코를 내세우기도 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건네기도 한다. 서로 다른 몸짓과 분위기를 지녔지만 '코'라는 공통된 특징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벽과 바닥, 스탠드 위에 자리한 형상들은 움직이지 않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은 채 조용히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나뭇결을 살린 작품들은 앉거나 서 있는 자세도, 코의 각도도, 표정도 모두 다르다.
작가는 "손 가는 대로, 나무 생긴 대로 만든다"라고 말한다. 억지로 형태를 끼워 맞추기보다 나무가 지닌 결을 따르다 보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피노키오가 태어난다는 설명이다.
장난처럼 시작된 나무, 평생의 길이 되다

▲손과 다리, 얼굴을 다듬는 과정에서도 가장 먼저 코를 정성스레 깎으며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의 모습. ⓒ 진재중
"많이 혼났어요. 손도 베이고, 상처도 입고… 몰래 작업하다가 들키기도 했죠."
그는 목수였던 아버지 곁에서 자랐다. 대팻밥 냄새와 톱밥 날리던 작업장이 놀이터였다. 열 살 무렵부터 독학으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기술을 배웠다기보다 손끝으로 나무의 결을 익혔다. 옹이의 단단함, 갈라짐의 방향, 습기를 머금은 나무의 숨결을 몸으로 배웠다.
아버지 몰래 장난감을 깎다 여러 번 혼이 났지만, 그 시간은 오히려 나무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손에 익은 나무는 취미가 되었고, 결국 평생의 일이 되었다.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 어느새 삶의 방향이 된 셈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광산 트럭 조수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거친 현장을 누비며 운전사로 일했다. 생계를 위한 시간이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 곁에서 익힌 나무의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운전대를 내려놓고 공예의 길을 택했다.
결혼 후 '오복공예사'를 열어 작업실을 꾸렸다. 광산의 먼지 대신 나무 향이 공간을 채웠고 조각칼은 삶을 일구는 새로운 도구가 됐다. 초기 작업은 지금의 목각 인형이 아니었다. 그는 통나무 속을 파내 함지를 만들었다. 광주리나 소쿠리처럼 쓰이는 나무 그릇이다.
정성껏 깎아낸 함지는 품질을 인정받아 입소문을 탔고 강릉 단오 기간 단오장에 선보인 작품들은 많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시간은 손기술을 다지는 수련의 과정이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나무 작업은 그렇게 조금씩 그의 삶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가짜 손님에서 진짜 손님으로
▲코쟁이 공예작가
폐목재를 활용, 피노키오 인형 2,700여 점의 작품을 만든 권오복 명인 진재중
그의 생업은 막국숫집이다. 막국수도 전통을 고집한다. 일명, 전통 재래식 '분틀 메밀국수'다. 손님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반죽을 분통에 넣고 공이로 눌러 면을 뽑아낸다. 그 분틀조차 직접 만든 것이다. 음식과 도구 모두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목각 인형은 한가한 시간에서 시작됐다. 손님이 뜸하던 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나무를 깎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은 가게를 지키는 '가짜 손님'이자 자신을 다독이는 존재였다. 그는 사람 형상이 사람을 부른다고 생각했고, 그 바람은 현실이 됐다. 긴 코의 인형을 전시한 뒤로 가게에는 발길이 이어졌다.
지금 그의 공간은 식당이자 작은 전시장이다. 손님들은 작품을 구경하고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막국수를 맛본다. 그는 주문을 받기보다 먼저 인형의 의미와 제작 과정을 설명하며 자신의 세계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아내의 핀잔도 따른다. 수익보다 작업에 더 몰두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아내가 잔소리를 많이 한다"라고 말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생계와 예술 사이에서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나무를 깎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코에 담은 가난과 꿈

▲권오복 작가가 유난히 코가 큰 인형을 가리키며 작품의 의미와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진재중
그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코를 본다. 코가 얼굴의 중심이자 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반듯하고 당당한 코에는 큰일을 해낼 기운이 깃들어 있고, 삶의 복 또한 그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의 균형 역시 결국 코에서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이런 생각은 그의 목각 인형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인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길게 뻗은 '코'다. 그는 코의 모양에 따라 인물의 성정과 기질이 달라진다고 본다. 그래서 둥글고 너그러운 코, 곧고 날카로운 코 등 각기 다른 표정을 지닌 인형들이 탄생한다. 인형의 이름에 '코쟁이'를 붙인 것도 같은 이유다. 코를 중심으로 저마다 다른 성격과 개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같은 믿음의 뿌리에는 어린 시절의 가난이 놓여 있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막연하게나마 '큰 코'에 부와 성공의 상징을 겹쳐 보았다. 넉넉하지 못했던 삶 속에서 큼직하고 당당한 코는 스스로가 이루고 싶었던 미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복과 기운이 가득 담긴 큼지막한 코를 지닌 얼굴을 조각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그의 인형 속 긴 코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삶의 결핍을 넘어서는 바람과 희망의 형상이다.
버려진 나무에 새 숨을

▲우스꽝스러울 만큼 과장된 큰 코를 단 목각 인형들이 저마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다. ⓒ 진재중
그의 작업실 한편에는 다양한 토종 나무들이 쌓여 있다. 박달나무와 고로쇠, 물푸레와 소나무, 모과와 향나무, 돌배와 대추나무까지, 그는 특히 수명을 다한 폐목재를 즐겨 사용한다. 길가에 버려진 나무나 창고에 묵어 있던 나무를 주워 모아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그중에서도 유독 애정을 쏟는 재료는 토종 대추나무다. 그는 마음에 드는 대추나무를 찾기 위해 전국을 직접 돌아다닌다. 그러나 개량종이 널리 보급되면서 순수 토종 대추나무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마음에 드는 나무를 발견해도 곧바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과의 협의와 매입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작업 재료가 된다.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그는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대추나무는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붉은빛이 살아나 점점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만질수록 애정이 깊어지지요. 여러 목재를 써봤지만, 제게는 대추나무가 가장 마음이 가는 재료입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대추나무의 매력을 설명했다. 그가 토종 대추나무를 고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결이 곱고 색이 깊을 뿐 아니라 단단하고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오랜 보존을 생각하면 다른 나무로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정성껏 구한 나무는 최소 4~5년간 충분히 말린 뒤 조각 작업에 들어간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 나무만이 그의 손끝에서 새로운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 이것이 그의 작업 원칙이다. 그는 나뭇결을 억지로 바꾸지 않는다. 갈라진 틈은 세월의 주름이 되고, 옹이는 눈과 표정이 되며, 뒤틀린 결은 인물의 몸짓으로 이어진다. 나무가 지닌 흔적을 지우기보다 그대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간다. 생을 마친 나무가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그는 그 시간을 '윤회'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코쟁이'인가

▲서로 다른 결을 지닌 폐목을 다듬어 완성한 ‘코쟁이’ 인형들이 나란히 서 있다. ⓒ 진재중
그는 동화 속 피노키오를 우리식으로 풀어 '코쟁이'라 부른다. 그러나 구조와 제작 방식은 전혀 다르다. 우리 전통 가구의 짜맞춤 기법을 응용해 관절을 연결하고 팔과 다리에는 폐목재를 활용한다. 이음새에는 대나무를 끼워 넣어 사람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아래에 페달을 달아 밟으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스탠드형 인형도 제작했다. 이러한 기술적 완성도를 인정받아 스탠드형 목각 인형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고 코를 탈부착할 수 있는 구조를 포함해 24건의 디자인과 상표를 등록했다.
유럽 동화의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토종 대추나무와 한국 전통 짜맞춤 기법을 더해 전혀 다른 형상으로 재해석했다. 그의 인형은 더 이상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한국적 숨결을 입은 '코쟁이'로 자리 잡았다.
작업실에 놓인 인형들은 각기 다른 삶의 표정을 품고 있다. 금세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아이, 익살스럽게 혀를 내민 얼굴, 난처한 기색이 스친 표정까지. 나뭇결과 옹이, 갈라진 틈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그대로 살려 자연스럽게 빚어낸 모습들이다. 손으로 억지로 다듬기보다 나무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에 인형들은 더욱 사람을 닮았다.
3000개의 꿈, 코쟁이 박물관을 향해

▲손대지말라는 안내 ⓒ 진재중
그가 지금까지 만든 목각 인형은 2700여 개에 이른다. 처음에는 500개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나무를 놓지 않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오면서 작품 수는 어느새 그 몇 배로 늘어났다. 그는 인형들을 두고 "다 제 자식 같다"라고 말한다. 하나하나에 자신의 시간과 손길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판매해 달라는 요청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점도 내놓지 않았다. 모두가 자식처럼 소중해 쉽게 떠나보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작품은 지역을 넘어 조금씩 세상과 만났다.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이름을 알렸고 지역 인형극제와 협업 전시를 하며 활동 영역도 넓혔다. 2019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에는 환경 미술제에 초청 작가로 참여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해 왔다.
그는 이제 3000점이라는 목표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 숫자를 채운 뒤 온전한 전시장이나 박물관을 세워 평생 깎고 다듬어온 작품을 국가에 남기겠다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다.
국숫집 옆에 마련한 작은 '코쟁이 박물관'은 그 꿈이 처음 형태를 갖춘 공간이다. 비록 아담하지만 그 안에는 50년 작업의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은은한 나무 향이 감도는 강릉의 작은 가게, 벽과 선반을 채운 인형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반세기의 세월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나뭇결을 따르는 손, 시간 위에 새겨진 삶

▲진열장 가득 2700여 점의 ‘코쟁이’ 목각 인형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 진재중
그는 오늘도 말없이 나뭇결을 따라간다. 서두르지 않고 거스르지 않으며 결이 허락하는 만큼만 칼을 댄다. 나무가 이끄는 방향에 자신을 맡긴 채 한 얼굴을 빚어내면 또 하나의 '코쟁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버려진 나무에 숨을 불어넣는 그의 손길은 곧 자신의 삶을 다듬어온 시간과도 닮아 있다. 거친 결을 억지로 지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깎아내기보다 기다리고 따르는 마음이 작품을 완성해 왔다.
그렇게 오늘도 먼지 가득한 작은 작업실에서는 나무 향이 고요히 번진다. 한 사람의 삶과 한 시대의 손길은 조용한 칼끝을 따라 이어지고 나뭇결 위에 또 하나의 시간이 차곡히 새겨진다.

▲먼지가 자욱한 작업실에서 장인은 3000개의 목각 인형 완성을 향해 몰두하고 있다. ⓒ 진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