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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은 삼시 세끼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주방 도구는 정리 후 다시 꺼내는 일이 다반사다. 자주 들락거려야 하는 주방 도구 특성상 정리가 미뤄지기 십상이어서 깔끔한 주방을 유지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일사천리, 쾌도난마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았던 30~40대엔 싱크대 위 도구들이 난립하는 게 꼴보기 싫어 각기 정해진 자리에 놓아두기를 철칙으로 삼았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정리의 힘)'가 '버리기'와 '자리 정하기'를 강조하기 이전부터 습관적으로 실천했던 게 정해진 자리에 제대로 정리하기였다.
육십이 된 지금은 그럴만한 에너지도 없을뿐더러 그 에너지를 차라리 날 위해 쓰자는 방식으로 사고가 바뀌었다. 노인정신의학 전문의 '와다 히데키(어른의 느슨함)'가 느슨한 자세로 사는 사람이 내면의 불안과 걱정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느슨함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에 공감하면서 말이다.
정리도 중요하나 편리는 더 중요
'어차피 다시 쓸 건데 피곤하게 뭐 하러 넣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소금병과 후추병이다. 이들은 조미료 칸의 제자리를 떠나 식탁 위에 버젓이 둥지를 틀 때가 잦다. 다른 일로 바빠서 정리를 미루는 것도 아니다. 손만 뻗으면 닿는 편한 자리에 놔두는 것이 어쩌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세뇌하며 스스로 정한 원칙을 지워나가는 것에 더 가깝다.
설거지를 마친 식기도 물기가 제거되면 제자리에 정리했다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요즘은 건조대에 그대로 둘 때가 허다하다. 금세 또 차릴 밥상에 써야 할 텐데 굳이 정리장까지 가야 하나 싶은 생각에 식기 건조대 안이 정착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림하는 공간이 맞나 싶을 만큼 싱크대 상판 위에 주방 도구가 최소로 자리한 인테리어 잡지를 볼 때면 그 정리법이 따라 하고 싶어진다. 너저분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도구를 꽁꽁 숨긴 지혜로운 황금손을 배워둔다고 손해 볼 일은 없잖은가. 유지하고 사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완벽한 정리의 매력을 알기에 인테리어 잡지를 한장씩 넘기며 정갈한 주방을 상상하곤 한다.

▲최소한의 도구만 노출되어 깔끔하게 정리한 주방 인테리어. ⓒ 언스플래시 제공
가끔 마음이 동할 때 한번씩 정리하고 둘러보며 '그래 이 맛에 정리하는 거지.' 혼잣말로 중얼거릴 땐 흡족한 마음이 절로 든다. '좀 꺼내놓고 살면 어때?'란 느긋한 마음가짐이 억지로 하도록 재촉하지 않아 정리에 몰입할 때도 피로감이 덜하다.
허리도 부실하고 손목도 약해진 후로는 편리하게 정리하고 꺼낼 쓸 수 있는 인테리어에 관심이 높아졌다. 허리나 손목, 무릎이 혹사당하는 일 없도록 숙이거나 구부리지 않고도 정리 가능한 주방 시스템이 눈에 띌 때면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나 싱크대 교체가 뚝딱 해치울 일은 아니잖은가.
없지만 필요할 땐 셀프 인테리어로 자체 제작
싱크대 하부장에서 큰 냄비를 꺼낼 때면 슬라이딩 선반이 떠오른다. 코너장 깊숙한 곳에 정리한 곰솥을 꺼낼 때도 360도 회전 선반이 설치된 주방이 아닌 게 못마땅해 씩씩대기도 한다. 그러나 교체할 만큼 싱크대가 낡지 않은 상태라 자체적으로 손 보는 '셀프 인테리어'에 만족하며 사는 중이다.
주방 자체가 구조적으로 숨은 장소라면 도구가 드러나도 신경 쓰이지 않지만 개방형은 적은 노출도 자칫 어수선해 보일 수 있다. 게다가 낯을 내밀 수밖에 없는 도구는 자리 정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 집 싱크대엔 전기밥솥 슬라이딩 선반도 부재중이다. 입주 때부터 설치되어있지 않아 아쉬웠지만 새 싱크대를 갈아엎을 순 없어 밥솥의 자리는 에어프라이어와 함께 아일랜드 식탁 위로 정했다. 그런데 그 자리가 키 큰 수납장 옆면과 맞닿아 있어 기기를 앞으로 끌어내야만 사용하기 편한 구조다.

▲밥솥과 에어프라이어가 놓인 자리는 키 큰 수납장과 맞닿아 있어 앞으로 끌어내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우리 집 주방 구조. ⓒ 오순미
가전제품에는 바닥과 접촉하는 부분에서 발생할 소음이나 긁힘을 방지하기 위해 고무 패드가 부착된 발이 달렸다. 기기의 미끄러짐을 방지하고 안전성을 확보하기엔 필수 장치지만 완성된 음식을 꺼낼 때마다 놓인 자리에서 끌어내기엔 번거로움이 따랐다.
밥솥 발엔 고무 패드가 장착되지 않아 앞으로 끌어내는데 지장은 없으나 잦은 마찰로 싱크대 상판이 긁힐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에어프라이어의 고무발은 밀착력이 뛰어나 꿈쩍도 하지 않아서 슬라이드 선반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 슬라이드 선반을 만들기로 했다. 어떻게 만들까 궁리하던 중 다이소에서 보았던 도마가 떠올랐다. 다이소표 주방 도마에 소형 바퀴만 달면 가성비 훌륭한 슬라이딩 선반이 완성될 것 같았다. 나사못은 이미 남편 도구함에 크기별로 구비된 상태고 전동 드릴도 있으니 준비물이 복잡하지 않았다. 도마는 28×36cm 크기의 대나무 도마를 준비했고, 소형 바퀴는 지름 1.2cm에 두께 0.8cm가 적당할 것 같아 쇼핑몰에서 구매하고 기다렸다.

▲뒷면에 소형 바퀴 4개를 달아 셀프 제작한 슬라이딩 선반 ⓒ 오순미
소형 바퀴가 도착한 날, 도마에 바퀴 달릴 위치를 표시하고 선반 하나에 소형 바퀴 4개를 달았다. 도마 두께가 1cm여서 1cm 미만의 나사못을 사용해야 돌출되는 일 없이 말끔한 선반을 만들 수 있다. 대나무 도마가 가볍지만 얇아서 못을 박으면 쪼개지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기우였다. 1만 3750원으로 슬라이딩 선반 두 개가 눈 깜짝할 새 완성되었다. 이럴 땐 고치고 만들기에 취미를 가진 남편의 '맥가이버 손'이 얼마나 유용한지 고마울 뿐이다.

▲셀프 제작 슬라이딩 선반 위에 올린 밥솥과 에어프라이어 ⓒ 오순미
새로 장만한 10인용 전기밥솥은 9kg으로 제법 무거운데도 소형 바퀴 4개가 견고하게 받쳐주어 슬라이딩이 수월했다. 선반 앞부분에 손잡이를 달까 하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도마를 잡고 끌어내는데 지장 없어 그대로 사용 중이다. 뽐낼 만한 모양새는 아니어도 편리성 면에서는 선반이 있기 전과 후의 차이가 확연히 달라 만족스럽다.

▲셀프 제작 슬라이딩 선반으로 밥솥이 이동하는 모습. ⓒ 오순미
대수롭지 않은 발상이지만 거기서 나온 편리는 데미타스가 품은 진하고 향긋한 크레마처럼 그럴싸하다. 슬라이딩 선반뿐 아니라 서랍 레일을 달아 만든 '프라이팬 걸이'도, 싱크대 상부장 밑단에 설치한 'LED 바 조명'도 만 원 안팎의 적은 비용으로 설치해 알차게 사용하는 중이다. 언박싱의 설렘 대신 합리적인 소비에 설레고, 세련된 디자인 대신 투박한 실속에 만족하는 '셀프 인테리어'는 시간에 구상을 덧댄 나만의 행복이다. 특별함보다 평범함에서 오는 행복이 빈번하듯이 불편한 데서 떠오른 작은 발상 하나가 미약하지만 봄의 첫 조짐 같아 그저 행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