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스파이더맨
- 손석호
나는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악의 꽃의 어느 페이지에 손가락을 꽂아 두고 있었고 형은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는데 잠자리가 우리의 여름방학처럼 거미줄에 달라붙어 퍼덕이고 있었어
형은 잠자릴 떼어 내 날려 보내며 말했지 겹겹이 둥글게 갇힌 과녁처럼 거미줄의 끈끈한 가로줄은 위험해 거미는 위험할 때 끈끈이 없는 세로줄을 타고 잽싸게 땅바닥으로 도망친대 거미도 가로줄엔 붙으니까
즐겁지는 않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거미줄보다 낮은 곳에 살고 있지 그렇다고 절대로 기어다니지는 않아 주로 걷는 척 뛰어다니지 높은 곳은 쳐다보지 않아서 줄이나 빽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십 년 만에 만난 형은 이제 줄 타며 산다고 한다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지 않아 한 뭉치의 세로줄을 둘러매고 다니며 공중에서 세로줄을 타고 땅바닥으로 도망치며 산다고, 이십 층 이상 올라가면 일당이 십만 원 올라간다고
출처_시집 <스파이더맨>, 파란, 2025.
시인_손석호 : 1994년 <공단문학상>과 2016년 <주변인과문학>으로 작품확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불타고 있다> <스파이더맨>이 있다.

▲우리는 위험과 안전 사이의 가로줄과 세로줄을 타고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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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은 누군가의 일터다. 생활전선의 복판이다. 어쩔 수 없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망설일 수 없다. 영웅이어서 위험을 무릅쓰는 게 아니다.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우리는 이 시에 언급된 대로, "잠자리"이기도 하고, "거미"이기도 하다.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밥을 벌자고, 생계를 책임지자고 하는 일이다. 퇴로는 없다. 건물 벽에 붙어 기는 삶은 처절한 생존의 자세다. 먼발치에, 저 멈춰 있는 존재가 실은 줄 하나를 붙들고 온 힘을 다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를 통해 새삼 깨단하게 된다. (문경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