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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9 15:27최종 업데이트 26.02.19 15:27

'먹고 산다'는 말이 부끄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김정주 지음 <보통 어른의 먹고사니즘>을 읽고

'먹고 산다'는 말이 늘 어딘가 민망했다. 어릴 때는 그 말이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삶의 이유가 겨우 거기에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언니와 함께 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체험 삶의 현장> 속 사람들은 늘 몸을 쓰며 일하고 있었다. 연예인들은 하루 체험으로 끝났지만, 그 일을 매일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어린 나에게는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때 마다 지나가듯 엄마가 말했다.

"몸 고생 안 하려면 공부 더 열심히 해야지."

그 말은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어쩐지 내가 추구해야 할 삶과는 다른 방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정주 작가의 신작 에세이 <보통 어른의 먹고사니즘>
김정주 작가의 신작 에세이 <보통 어른의 먹고사니즘> ⓒ 김정주
김정주 작가의 <보통 어른의 먹고사니즘>(2026년 1월 출간)을 읽었다. 제목부터 낯설었다. 먹고 산다는 말을 이렇게 정면으로 꺼내는 책이라니. 여전히 그 말은 투박하고,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말을 피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그 말 속에서 살아온 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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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난 다음 날, 나는 바로 알바를 시작했다. 냉동 삼겹살 전문점이었다. 오후 네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불판을 닦고, 고기를 나르고, 손님을 맞았다. 두 달을 겨우 버티고 그만뒀다.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병원 검체를 옮기는 일, 공부 의지가 없는 아이의 수학 과외, 방학마다 이어졌던 공부방 교사. 한 학기 휴학을 했을 때는 일본 시계 공장에서 일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우주복 같은 작업복을 입고 하루 종일 부품을 검수하던 날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던 사소한 대화는 오래 기억에 남았지만, 사무실로 옮겨간 뒤에는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며 일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늘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노동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거실 창문에서 바라본 자카르타 풍경
거실 창문에서 바라본 자카르타 풍경 ⓒ 전세정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배웠다. 그 말은 너무 당연해서 의심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노동의 현장을 가까이서 겪을수록, 그 말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자주 무너지는지 보게 되었다.

어떤 일은 존중받고, 어떤 일은 필요하지만 낮게 취급되는 장면들을 수없이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의 차이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였다. 누군가는 '일하는 사람'으로 불리고, 누군가는 '부르는 사람'이 되는 구조 속에서 나는 종종 작아졌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멈춰 선 장면이 있다. 저자가 대리운전을 마치고 돌아가던 밤,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는 대목이다.

"나는 일회용 노동자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사람이다.
내 존재만큼은 일회용이 아니라고 스스로 주문하듯 믿어 본다."(87p)

이 책에서 저자는 여러 노동 현장을 지나며 살아온 시간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사우나 청소, 대리운전, 일회성 노동을 전전하며 버틴 날들이 이어진다. 거창한 성공담 대신, 먹고 사는 하루를 어떻게 견디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했던 아르바이트를 거의 떠올리지 않고 지냈다. 그 시절, 나는 그 일을 친구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여겼고, 어쩌면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십여 년이 흘렀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시간들이 다시 돌아왔다. 고깃집 불판 앞에 서 있던 밤, 병원 사이를 오가던 낮, 시계공장에서 하루 종일 부품을 들여다보던 시간까지. 그때의 나는 그 시간을 오래 붙잡고 싶지 않았다. 힘들어서라기보다, 그저 잠시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 학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선택한 일들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그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력서에도 남지 않았고 누구에게 설명한 적도 없지만, 분명히 내 안에 남아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먹고 산다'는 말이 예전처럼 낯설게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매일 그렇게 하루를 건너고 있고, 나 역시 그 시간을 지나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 책을 읽으며 자꾸 멈추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누구나 지나왔을 법한 시간들이 조용히 놓여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산다'는 말은 여전히 투박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말 위에서 하루를 건너고, 또 하루를 이어 간다. 이 책은 그 시간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자카르타의 새벽 해뜨는 것을 보며 도시락을 쌉니다.
자카르타의 새벽해뜨는 것을 보며 도시락을 쌉니다. ⓒ 전세정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보통 어른의 먹고사니즘 - 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유쾌하게 사는 법

김정주 (지은이), 포르체(2026)


#김정주#포르체#보통어른의먹고사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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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장면들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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