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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5년 발표된 정부의 노동안전종합대책에는 작업중지권 확대의 하나로 '작업중지 또는 시정조치 요구 권리 신설'이라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하나라도 확대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한편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일하면서 위험을 느낄 때 사업주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행동을 왜 우리는 법조문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역으로, 이토록 당연한 권리마저 법전에 적혀있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는 보장되지 않는 것일까? 나아가 법에 문구 몇 줄 넣어놓는다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시정조치'를 요구할 수 있을까? 비관적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러저러한 규제를 추가하고 법조문을 신설해도 산업재해가 극적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감독 물량의 확대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산재예방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필요한 안전보건 법체계의 변화는 무엇인지, 새로운 법체계는 사업주의 의무, 노동자의 권리, 나아가 국가의 책무를 어떻게 선언하고 규정할 것이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지시규제적 법제도에 가로막힌 보편적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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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안전보건 법체계의 핵심이 '사업주의 포괄적인 의무'라면 이와 연동하여 노동자의 권리는 더욱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가 천부인권 수준의 보편적 권리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법체계는 과연 그렇게 작동하고 있는가? 산업안전보건법이 명시하고 있는 노동자의 권리는 사실상 작업중지권 조항 정도이며, 알 권리, 참여할 권리, 보호받을 권리 등은 안전보건교육,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안전조치, 보건조치 등 사업주의 의무를 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권리로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현실에서 사업주의 안전보건확보의무는 지시규제적 조항들로만 협소하게 적용되어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권리보장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불법은 아닌' 상황에만 머무르게 된다.

일례를 들어보자. 많은 사업장에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자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안전 확보를 위해 어떠한 조처를 할 것인지 심의하다보면 결국은 위법성 여부가 쟁점이 되고 만다.

사측은 사측대로, 노측은 노측대로 법률 자문을 받고,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법정이 된다. 산안법 혹은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명시된 조치에 매몰되면 결국 노동현장의 실재하는 위험과 특수성, 사업장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못하게 된다.

노동자들이 법전과 줄자를 들고 일하는 감독관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심지어 감독관도 마찬가지다. 영국 HSE(보건안전청) 집행정책 선언문을 보면 지시규제적 법조항에 구속되지 않는 접근 방법이 어떤 것인지,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안전권을 확보하기 위한 법의 작동방식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일부 건강 및 안전 의무는 구체적이고 절대적입니다. 다른 의무는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범위 내에서" 조치를 요구합니다. …(중략)… 검사관들의 일관된 접근방식을 기대한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일관성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산업, 작업장, 위험 요소, 관리 시스템 등에 따라 모든 상황은 다릅니다.

…(중략)… 따라서 어떠한 집행 결정도 개별적 재량권과 전문적 판단의 적절한 행사를 필요로 합니다. …(중략)… 검사관이 특정 작업 활동이나 공정과 관련하여 중대한 인명 피해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거나, 중대한 결함이 확인된 경우 주요 위험의 영향을 방지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금지 통지를 발부할 수 있습니다. 법위반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 Health and Safety Executive Enforcement Policy Statement (2015)

이들의 접근방식은 결국 위험성평가가 지향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위험의 크기와 현장의 상황에 따라 허용 가능한 수준으로 위험을 관리한다는 것. 감독행정의 접근 방식이 이러해야 '개선 방안'이 비어 있는 한국의 위험성평가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2025.11.28 민주노총과 노동자건강권운동단체들이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위험작업 중지, 노동자 참여' 실질 보장을 위한 즉각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선언을 발표했다.
2025.11.28 민주노총과 노동자건강권운동단체들이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위험작업 중지, 노동자 참여' 실질 보장을 위한 즉각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선언을 발표했다. ⓒ 노동과세계(송승헌)

차등적 의무규정에 가로막힌 보편적 권리

지시규제적 감독행정에 길들여진 사업장의 체질 개선이 하나의 큰 산이라면, 또 다른 산은 차등적인 의무규정으로 배제되는 노동자들의 권리 문제다. 앞서 서술했듯이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는 사업주의 의무에 기반해 있다. 그런데 법이 정하는 사업주의 의무는 평등하지 않다. 업종, 규모, 고용형태 등에 따라 상당한 의무가 면제되는 구조다.

산업안전보건법 제1조(목적)는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의 안전 및 보건을 유지·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얄궂게도 제2조(정의)에서 '근로자'는 근로기준법에 따른 근로자로 한정하고, 제3조(적용범위)에 이르러서는 법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적용하지 않는 사업과 사업장을 정하고 있다.

가장 광범위하게 면제되는 사업주의 의무는 안전보건교육에 대한 것이다. 금융 및 보험, 사회복지, IT 및 전문과학기술 서비스 등의 사업은 완전히 면제하고 있고, 농어업을 포함한 14개 업종에 대해서는 50인 미만에 한해 면제하고 있다. 그리고 5인 미만은 모든 업종에서 면제 대상이다.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업종들의 의무를 면제했다고 하나, 실제 중대한 사고가 잦은 농어업이나 특수한 유해위험이 많은 과학기술, 연구개발 등 부적절한 기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하지만 의무 대상을 무조건 확대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교육은 결국 일터의 위험에 대한 노동자들의 '알 권리'의 실현이며, 교육에 대한 의무규정만으로 충족할 수 없는 이들의 알 권리를 온전히 보장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러 가지 보완책이 있겠으나, 모든 사업장에서 위험성평가를 통해 안전보건 정보가 충실히 제공되고 노동자들의 참여가 정착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보편적인 알 권리를 보장하는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대표적인 의무는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에 대한 것인데, 이 의무는 노동자의 '참여할 권리'와 직결되어 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참여권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할 의무는 업종에 따라 50인, 100인, 300인 이상으로 정하고 있고 건설업의 경우 120억, 150억 이상의 공사로 한정하고 있다.

차별은 규모에 그치지 않는다. 제조업이든 건설업이든 원·하청 관계 속에서 하청노동자들의 참여권은 규모와 무관하게 극도로 제한되어 있으며,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사실상 사업주의 지배·관리하에서 일하면서도 안전보건관리체계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참여권의 소외는 규모만이 아니라 공공행정, 교육서비스업 등에 남아 있는 '현업노동자' 규정을 통해서도 발생한다.

학교에서는 특수교육실무사, 과학실무사, 스포츠강사 등이, 공공행정에서는 수도검침원, 방문간호사, 주차단속원 등 수많은 노동자가 안전사고, 폭력, 감정노동, 근골격계질환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여전히 매우 협소한 업무만을 현업노동자로 규정하고 그 외의 노동자들은 안전보건관리체계에서 배제되어 있다. 심지어 현업노동자 숫자가 100명이 넘어야 산업안전보건위원회 구성 의무도 발생하는 구조다.

상상력을 가로막는 법제도를 넘어

우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구시대적인 현업노동자 규정의 철폐, 특수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산안법 및 산재법 적용 확대, 개정 노조법에 따른 원청 교섭권의 보장 등의 조치가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는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참여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물론,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의무를 무제한으로 확대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의무로 규정하지 않으면 권리가 제한되는 법체계의 맹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어떠한 법제도적 변화가 가능할까? 첫째, 소규모사업장에서도 작동 가능한 노동자참여제도를 구상해야 한다. 근로자대표의 안전보건 관련 권한을 강화하거나, 5인 미만 사업장까지도 최소한의 안전대표자를 선임하도록 하는 방안 등 다양한 해외사례들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업장 단위를 뛰어넘는 자기규율 예방체계의 구축을 정부와 지자체의 책무로 삼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소속 사업장의 한계로 인해 안전보건관리에 참여할 기회가 없다 하더라도 공단, 지역, 시장, 상가, 골목 등의 단위로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수준의 사업주 의무와 더불어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의 책무가 법제화될 필요가 있다. 물론 많은 실험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사업장 단위로만 의무를 규정하고 역량이 부족한 사업장에는 의무를 면제해주는 법제도의 기본틀로는 지금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법의 본령이 의무와 처벌을 규정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의 안녕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산업안전보건법에 노동자의 권리를 선언하자는 주장은 순진한 생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의무-면제 중심의 법체계 변화와 개별사업장만을 단위로 삼는 법구조를 뛰어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2월호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최진일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운영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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