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7일 오후 열린 박정현 부여군수의 출판기념식에 참석해 박 군수와 악수하고 있다. ⓒ 박정현 부여군수 페이스북
지난 7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박정현 부여군수의 출판기념회에서 포착돼 논란이 불거졌다. 고(故) 이해찬 전 총리 빈소 조문, 과거 함께 일했던 인사의 출판기념회 참석. 공직 출마도, 정치 선언도 아니긴 했으나, 그의 등장만으로 시끄러워졌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안 전 지사는 수행비서 성폭력 혐의로 201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확정받았고, 2022년 8월 만기 출소했다. 법적 처벌은 끝이 났다.
형벌의 집행과 사회적 처벌의 연속성에 대하여
이를 두고, 12일 하태경 전 의원은 최근 이런 글을 올렸다.
"정치인 안희정이 아니라 적어도 시민 안희정에겐 두 번째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 공직출마나 임명도 아닌 사적 친분 있는 인사의 행사에 참여한 지극히 시민적인 활동만으로 지탄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시민권마저도 안희정에겐 영구히 박탈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원칙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 형벌을 마친 시민에게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를 허용하고 어디까지를 금지해야 하느냐는 점이다.
법치주의는 형벌의 시작 만큼이나 그 끝도 분명히 해야 한다. 형기를 마친 사람의 사회 복귀는 재범 방지와 인권 보호 양면에서 필수적이다. 법이 내린 처벌과 사회의 계속되는 비난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불합리하다.
처벌은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안희정의 경우, 이 일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하태경 전 의원의 주장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권력형 성범죄는 왜 다른가
안희정의 범죄는 단순한 성범죄가 아니었다. 지사와 수행비서라는 압도적 권력 비대칭 속에서 발생한 구조적 폭력이었다. 권력형 성범죄의 핵심은 '권력'이다. 가해자는 권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고, 피해자는 그 권력 구조 속에서 저항조차 어려웠다. 이는 개인 간 일탈이 아니라 공적 권력과 조직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조를 무너뜨린 행위였다.
따라서 권력형 성범죄는 더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달라진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과연 '순수한 사적 영역'인가. 그리고 그에게 그러한 영역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태경 전 의원은 "사적 친분 있는 인사의 행사에 참여한 지극히 시민적인 활동"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이해찬 전 총리 빈소, 정치인 출판기념회. 이곳은 개인적 인연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네트워킹의 장이다. 한국 정치에서 조문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다. 관계를 재확인하고, 향후 행보를 가늠하며, 신호를 주고받는 공간이다. 출판기념회 역시 정치적 결속과 동원의 장이다.
그가 공개된 정치 행사에 참석하는 순간, 언론의 보도 가능성은 예정된 수순이다. 문제는 언론의 관심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공간의 성격이다. 그 공간은 애초에 공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공적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에게 '완전히 사적인 정치 공간'은 성립하기 어렵다. 적어도 정치권 내부에서는 그렇다.
"과거 함께 일했던 사람의 경조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혹하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참석을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다. 그는 참석할 수 있었고, 실제로 참석했다. 다만 그 선택이 사회적 평가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단순히 사적·공적 영역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회적 비판은 처벌이 아니다. 여기서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안희정이 받고 있는 것은 법적 제재가 아니다. 형벌은 끝났다. 그는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 국가는 그의 시민권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민들이 그의 행보를 비판하는 것, 정치권 인사들과의 공개적 접촉을 문제 삼는 것, 그와 함께 사진 찍는 정치인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국가권력의 처벌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이며, 민주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공적 평가다.
하태경 전 의원은 "일상적인 시민권마저 영구히 박탈"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개념의 혼동이다. 안희정의 시민권은 박탈되지 않았다. 그가 받고 있는 것은 사회적 비판이지, 법적 제재가 아니다.
'비판받지 않을 권리'는 시민권이 아니다. 만약 사회적 비판까지 시민권 침해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공적 인물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오히려 건강한 민주사회의 증거다.
피해자는 어디에 있는가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피해자는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
형벌이 끝났다고 피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는 단순한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권력과 조직 신뢰의 붕괴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 상처는 트라우마를 넘어 사회적 낙인과 고립을 동반한다. 그런 피해자가, 가해자가 정치권 행사에 등장하고 언론에 보도되며 "복귀 수순 아니냐"는 해석이 오가는 장면을 마주할 때 받는 충격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권력형 성범죄는 형벌로 종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이며, 공적 책임의 문제다. 대중이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의 공개적 참회나 사과가 충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다. 형기를 마쳤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 책임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가 평생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생업을 위해 강의하거나 글을 쓰는 것,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 소수의 지인과 조용히 만나는 것까지 금지할 수는 없다. 이는 기본권의 영역이다.
그러나 정치권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공개 행사에 참석하는 것, 언론 보도를 동반하는 활동을 하는 것, 정치적 메시지로 읽힐 수 있는 행보를 보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는 권력 영역과 다시 접촉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이런 비판이 계속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시간은 분명 의미를 갖는다. 형벌 직후와 수년이 지난 시점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사회는 변화와 회복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다. 진정한 참회가 있었는가. 피해자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성찰이 있었는가.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권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권력 영역으로의 복귀는 더욱 엄격한 기준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공정한 잣대의 적용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성평등과 피해자 보호의 기준이 정치적 진영에 따라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어떤 진영의 권력형 성범죄에는 강경하고, 다른 진영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만약 그런 불균형이 존재한다면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지적이 개별 사안의 책임을 흐리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저쪽도 그렇지 않느냐"는 방식은 정의가 아니다. 해답은 관대함의 확대가 아니라 공정함의 균형이다. 우리는 모든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진영과 무관하게.
요점은 단순하다. 형벌의 끝은 인정하되, 권력형 범죄의 복귀 신호에는 더 높은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에게 사적 영역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생업과 최소한의 사적 관계는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과 인접한 공간에서는 '사적'이라는 이름이 쉽게 성립하지 않는다.
형기를 마친 사람의 기본권을 보장하되, 권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른 자의 권력 복귀에는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피해자의 존엄과 회복을 우선하며, 모든 가해자에게 진영과 무관한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