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술 발전과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를 토대로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렸다. AI가 일상을 편리하게 만들었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속도전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과 일자리에 대한 위협이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AI 확산을 떠받치는 데이터 센터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그 데이터 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집어삼키는 어마어마한 전력과 물은 또 어떤가. 물과 전기는 모두에게 돌아가야 하는 공공재이지만, 대만의 사례는 이러한 믿음이 시장 논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기 십상이라는 현실을 보여준다. 2021년 대만은 1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맞았는데, 당시 대만 정부는 농업용수까지 끌어와 반도체공장에 필요한 물을 공급한 바 있다. 기술 진보를 운위하기 전에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가져가는가"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신격화된 반도체 산업, 기후정의의 언어로 보자
그럼에도 거대 자본은 반도체를 '국가경쟁력'과 '미래 먹거리'로 신격화하며 보수 양당과 함께 무리한 확장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 핵심 장치가 지난 1월 29일 본회의를 통과한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이다. 삼성, SK가 주도하는 초대형 반도체 산업단지(메가클러스터)에 공업 용수, 전기(송전 시설), 도로 등 각종 인프라를 국가가 무상 지원하는 법안이다. 재벌에 우리의 혈세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환수 대책도 없다. 재벌의 부가 공공에게 돌아가지 않는 현실에서 무상의 혈세 지원과 인프라 지원은 명백한 재벌 특혜이다.
우리의 삶은 노동권과 환경정의를 지키고, 필수 공공재에 대한 민주적 통제권을 자본과 그에 편승하는 정치권에 넘기지 않을 때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반도체특별법 저지 투쟁은 재벌 중심의 정치와 경제 문제도 짚으며 노동권과 기후정의, 환경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지난 1년 동안 공동행동은 해당 법안의 문제를 줄기차게 지적하며 각종 토론회, 집회, 캠페인을 벌여 왔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와 집권여당 주도의 국회는 주 52시간 노동시간 적용제외 조항과 노동쟁의 제한 조항만을 노동시민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철회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고스란히 살린 채 상임위, 법사위를 지나 본회의까지 통과하고 말았다.
노동시간 쟁점에서 재벌특혜 비판으로
법이 국회도 통과한 마당이지만, 지난 1년간 반도체특별법을 둘러싸고 전개돼 온 다른 목소리를 돌아보자. 2025년 2월 공동행동 출범에 앞서 그해 1월 '정의로운 반도체 산업은 가능한가' 토론회가 기후정의동맹 제안으로 열렸다. 반도체 산업을 기술·수출·국가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권, 물·전기라는 필수 공공재,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라는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다룬 첫 시도였다.
'첨단'이라는 말이 가리는 실체-수많은 유해 화학물질과 방사선 위험, 야간교대노동, 위험의 외주화 등 노동자 건강권 문제를 포함해, 막대한 에너지와 공업 용수 사용 문제를 함께 드러내고, 기후정의운동과 노동자건강권운동이 결합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입법 저지 투쟁의 도화선은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 적용제외 시도였다. 정치권은 구개발 노동자에게만 적용제외를 한다고 했지만 현장에서는 즉각 반발했다. 예외가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모아졌다.
이것을 계기로 2025년 2월 양대노총, 노동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 등 70여 단체가 결합해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반대 공동행동'이 출범했다. 공동행동은 기자회견, 토론회, 거리 캠페인, 연속 기고, 집회, 서명운동을 이어가며, 반도체특별법이 단지 노동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각종 규제 완화, 세제 감면과 보조금, 예비타당성조사 특례, 전력·용수·도로 같은 공공 인프라를 재벌에게 우선 배분하는 법, 공공재정을 특정 대기업의 이윤으로 전환시키는 법이라는 점을 공론화했다.
건강권과 노동권 침해 막아냈지만… 법안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거센 반발 속에서 주 52시간 적용 제외 조항은 삭제되었고, '산업평화를 위해 노동쟁의를 엄격히 준수한다'는 내용 같은 노동기본권 침해할 수 있는 일부 조항도 삭제되었다. 정부가 중소기업 등 혁신·발전을 지원한다는 조항(17조)에는 미약하게나마 연구개발, 실증, 안전관리 및 관련 기반시설의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법의 골격은 그대로 남았다. 전력용수 등의 인프라 제공은 물론이고 사용료, 대부료 감면, 조세특례제한법(세제혜택), 운영자금 지원, 반도체산업 인력 양성(반도체고등학교, 특성화대학교, 대학원 지정 등으로 인력 육성), 재정지원, 각종 규제완화 등 반도체특별법은 여전히 재벌에게 막대한 특혜를 약속하고, 그 비용을 시민의 세금과 노동자의 희생, 환경과 지역의 파괴로 떠넘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과제
수도권과 대기업의 전력 수요를 위해 다른 지역의 공동체가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25년 12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재검토와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 전국행동'이 출범했다. 반도체특별법 저지 공동행동은 송전탑 건설반대 전국행동의 출범을 지지하면서도 국가산단의 '지방 이전'이 아니라 계획 자체의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성명을 냈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역으로 산단을 이전하면 송전선로 건설 필요성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는 이해하지만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에너지와 물이 지역 주민의 삶과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산업의 생산을 떠받치는 자원으로 소모될 뿐이기 때문이다. "지방 이전이 일자리 창출 등 지역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도 재고가 필요하다. 자동화와 스마트화로 일자리 효과는 미미할 것인데다가, 위험업무에 대한 외주화 등 다단계 하청구조가 고착화된 반도체산업에서 '안전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도체를 누가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생산할 것인가. 한정된 자원과 에너지를 어떤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할 것인가.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건강과 생명, 환경과 기후위기는 분리된 의제가 아니다. 아직 반도체 노동자의 조직력과 민주적 통제의 가능성은 미약하지만, 발전 노동자들의 정의로운 전환 투쟁의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간의 반도체특별법 저지 투쟁이 남긴 과제는 결국 '정의로운 전환의 길을 내는' 투쟁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재벌특혜에 맞서 노동권과 환경정의를 함께 지켜내는 투쟁, 우리의 삶을 자본이 아니라 우리가 통제하겠다는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2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이종란 님은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 집행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