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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옥당의 개량독서대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74년에 출원한 실용신안 '개량 독서대' 위에 법전이 펼쳐져 있다. 삶의 절박함이 빚어낸 이 실용신안 속에서 나는 실습실 밤을 지새우던 나의 제자들을 보았다
마옥당의 개량독서대노무현 전 대통령이 1974년에 출원한 실용신안 '개량 독서대' 위에 법전이 펼쳐져 있다. 삶의 절박함이 빚어낸 이 실용신안 속에서 나는 실습실 밤을 지새우던 나의 제자들을 보았다 ⓒ 오성훈

방학이 시작되면 내 삶의 좌표는 경남 창원 동읍으로 이동한다. 치매라는 불청객을 맞이한 어머니를 대신 돌보기 위해서다. 몇 해 전, 어머니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꽤 오래 사셨던 김해 진영을 떠나 누이가 사는 동읍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진영에 계실 적만 해도 어머니는 정정하셨다. 그때는 어머니 댁에 올 때마다 지척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를 들르는 것이 당연한 일과였다. 하지만 동읍으로 이사하신 후로는 봉하의 길보다는 주남저수지의 철새를 구경하는 날이 더 잦아졌다. 어머니의 기억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속도만큼, 나의 발걸음도 봉하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다.

기술자 노무현, 그 '절박함'이 빚어낸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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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학, 일주일간의 휴가를 내고 다시 어머니 집을 찾았다. 어머니를 유치원(데이케어센터를 우리가족이 부르는 이름)에 보내드리고 진영 봉하마을을 찾았다. 노무현 기념관이 새 단장을 한 이후로는 처음 방문하는 길이었다. 새로 문을 연 노무현기념관, 그곳에서 가장 오래 서 있던 곳은 그의 '실용신안등록' 기록 앞이었다. 독서대를 개량하고, 청와대 업무시스템인 'e-지원'을 직접 설계했던 그의 면모는 영락없는 '기술자'이자 '혁신가'의 그것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만약 그의 삶이 그토록 절박하지 않았다면, 그는 고시 공부 대신 자신의 창의적인 발명을 사업으로 연결한 성공한 사업가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실용신안은 단순히 재주가 많아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의 불편함을 개선해야만 했던 삶의 절박함이 그를 법전 너머의 세상으로 이끌었으리라. 그 마음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의 한파 속에 새벽마다 신문 배달을 하며 전기 회로를 만지던 나의 제자와 닮아 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사자바위 정상에서 내려다본 봉하마을 저 멀리 뻗은 길과 들판은 노무현이 꿈꿨던 '사람 사는 세상'의 광활한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우측으로는 부엉이 바위가 있는 봉화산, 들판 넘어 좌측은 마옥당이 있는 뱀산이다
사자바위 정상에서 내려다본 봉하마을저 멀리 뻗은 길과 들판은 노무현이 꿈꿨던 '사람 사는 세상'의 광활한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우측으로는 부엉이 바위가 있는 봉화산, 들판 넘어 좌측은 마옥당이 있는 뱀산이다 ⓒ 오성훈

기념관을 나와 자석에 이끌리듯 사자바위로 향했다. 길목에서 마주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라는 글귀가 묵묵히 제 갈 길을 갔던 한 인간의 흔적처럼, 33년 직업교육의 외길을 걸어온 내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사자바위 정상에 서자 시야가 탁 트였다. 동행했던 매제와 나눈 대화의 끝은 결국 그의 일갈로 향했다.

"광주에서 콩이라고 하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부산에서 팥이라고 하면 광주에서도 팥인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대, 그는 광주의 콩과 부산의 콩이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던졌다.

그렇다. 대학 나온 기술자나 고등학교 나온 기술자나, 그 역량이 같다면 결코 다르지 않은 기술자다. 출신학교가 아닌 직무 역량에 따른 채용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출신학교·학력 채용 차별 방지법'을 적극 지지하는 이유다.

마옥당에서 떠올린 제자의 '거친 손'

봉하마을 들판 너머 외로이 서 있는 마옥당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법전과 씨름하던 청년의 토굴은, 수십 년 뒤 거친 손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마이스터고 아이들의 실습실과 닮아 있다
봉하마을 들판 너머 외로이 서 있는 마옥당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법전과 씨름하던 청년의 토굴은, 수십 년 뒤 거친 손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마이스터고 아이들의 실습실과 닮아 있다 ⓒ 오성훈

사자바위에서 내려와 들판 너머 뱀산 기슭에 자리한 마옥당(磨玉堂) 터로 향했다. '옥을 가는 집'이라는 이름처럼, 청년 노무현이 가난과 싸우며 고시 책과 씨름했던 그 작은 토굴 같은 집. 그가 마옥당에서 흘렸을 땀방울을 상상하자니, 1990년대 말 실습실에서 배선을 맞추고 납땜을 하던 전기과 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부모 없이 형이랑 살던 그 아이의 절박함을 알기에, 신문 배달 수입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석 달 치 밀린 급식비를 몰래 대신 내주고 졸업을 시켰다. 녀석의 자존심이 다칠까 봐 "선생님이 미리 내줬으니 나중에 크게 성공하면 100배로 갚으라"며 짐짓 호통을 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녀석은 소식이 없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그 아이에게 허락한 자리가 그만큼 좁고 험난했던 것은 아닐까. 녀석이 어디에선가 제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고 있다는 안부만이라도 듣고 싶을 뿐이다.

봉하마을 곳곳에 새겨진 "정직하게 땀 흘리는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라는 글귀는 바로 그 아이들을 위한 헌사였다. 세상은 그들을 '고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지만, 그들이 정성을 다해 일구는 기술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실체다. 실용신안을 고민하며 정직한 땀을 흘렸던 대통령의 절박함과 전기 회로를 만지며 미래를 꿈꾸던 제자의 절박함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임기 반환점에서 다시 새기는 '모난 돌'의 기백

우리 세대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노무현은 그 금기를 깨고 스스로 '모난 돌'이 되기를 자처했다. 평탄한 교장의 길이 아니라 학교 현장의 절박함을 소리치는 시민기자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도 그와 조금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의 제자들이 그가 겪었던 그 외로운 싸움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어느덧 서울로봇고등학교 공모교장으로서 4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서울로봇고의 첫 평교사 출신 공모교장이라는 무게감에 때로는 숨이 가쁘기도 하다. 하지만 어머니를 돌보며 봉하에서 마주한 문장들은 내게 다시 나아갈 기백을 충전해 준다.

다짐해 본다. 우리 아이들이 교문을 나설 때, 그들의 가슴 속에는 '바보 노무현'이 가졌던 당당함과 창의적인 기술자의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기를. 학력을 넘어 기술로 세상을 품는 그들의 정직한 손이, 결국 이 세상을 더 따뜻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희망의 도구가 될 것이라 믿는다. 내 마음속에서는 지금, 그가 심은 '콩'이 아이들의 꿈과 함께 자라고 있다.

어디선가 묵묵히 살아가고 있을 그 제자에게도, 그리고 지금 우리 곁의 모든 아이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당신들의 거친 손이야말로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성훈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봉하마을#사자바위#마옥당#실용신안#혁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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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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