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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 7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백기완 선생님 5주기(2월 15일) 추도식이 열립니다. 추도식을 앞두고 생전 백기완 선생님과 함께했던 이들이 추모글을 보내와 여덟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1987년 민중후보 백기완
1987년 민중후보 백기완 ⓒ 이기원 사진가

나는 백기완-주재환-신학철-김용태-강요배로 이어지는 백기완 계보다. 1986년 그림마당 민에서 선생을 가까이서 뵌 이래, 1987년 대통령선거 백본(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민중의당-민미협-민예총 활동을 하면서 선생의 지근거리에 있었고, 성균관대 명륜당에서 혼례를 올릴 때는 선생이 길눈이(주례)를 봐주셨다.

"이 보라우 이종률이, 길을 가다 허방에 빠지지 말라우" 조고각하, 살다 보면 여러 고비가 있을 터이니 유혹에 빠지지 말고 늘 현실과 스스로를 잘 살피라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선생이 내게 준 주례사였다.

백기완 선생은 질풍노도와 풍찬노숙의 삶을 살았다. 늘 투쟁의 현장에 있었고 적들과 대면하는 거리에 선 길 위의 인생이었다. 머리카락 휘날리며 목청을 토하는 불쌈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선생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기가 두려웠다.

백기완 대학로 유세장에 모인 20만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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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의 미학은 '아해 같은 어른'이다. 아해같이 자주 울고 잘 운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옥에 갇혔을 땐 창살을 붙잡고 호랑이처럼 울었다. 오윤의 그림 앞에서도, 이애주의 춤판에서도 울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누이를 생각하면서 울고, 앞뜰 살구나무가 꽃을 피워도 우셨다.

선생은 아해같이 울다가 어른답게 싸웠다. 1970년대 모진 고문으로 80kg이 넘는 건장한 몸이 40kg으로 수척해져서도 군사독재와 싸웠고, 1980년대 통일문제연구소와 민통련 시절, 전두환 살인정권을 질타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싸웠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나는 백본 선전국에서 일했다. 각종 포스터, 깃발, 현수막을 제작하고 백본 신문 <민중시대>의 기자로 활동했다. 내 왼손 주먹이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림을 그려 백본의 상징으로 썼고, 류연복 형이 주필을 맡은 걸개그림 '민중의 바다' 기획 제작에 참여했다. 바닷물이 태극 모양으로 갈라 치는 파도 장면을 배경으로 김구-장준하-백기완의 얼굴을 형상화한 수작이었는데, 지금은 그 그림이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나는 이른바 제헌의회(CA) 그룹 소속으로 대통령선거 독자후보 전술 프락션(강제개조작업)을 하러 운동권 사무실을 들락거렸는데, 이미 문화운동판은 독자후보 지지세가 강했다. 주재환, 신학철, 김용태, 이애주, 임진택, 김도연, 홍선웅, 류연복, 최병수 등이 모두 백기완 선생 지지파였다.

1987년 12월 5일과 12일 대학로 유세장에는 각각 20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종로 5가 사거리까지 가득 찬 군중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서울대병원 앞 은행나무 가지에는 사람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민중의 바다' 등 걸개그림과 깃발그림, 광주학살 주범 처단을 요구하는 현수막, 밥 자유 평등 평화 통일을 상징하는 오방기 수천 개가 대학로 일대를 수놓았다.

백 선생은 찬바람에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사자후를 토했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유세연단에 올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벅찬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서 눈물이 났다.

백기완 미학의 핵심

 1992년 민중후보 백기완
1992년 민중후보 백기완 ⓒ 이기원 사진가

1992년 대선 백본에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6월항쟁으로 열린 1987년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에 민중의 결집된 힘으로 단일화를 강제하고자 하는 명분이 있었지만, 1992년 선거는 상대적으로 그 명분이 약하다고 보았다. 더군다나 대선 6개월 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열린 재야 정치집회에서, 제 운동진영에서는 직접투표를 통한 민중대통령후보 선출 프로세스를 결의한 바 있었다. 그 와중에 프로세스의 두 주역이었던 강기종 선배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고, 민중당의 장기표 선배도 이선실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상황이었다.

1992년 백본 출정식을 겸한 기금 마련 전시회가 열린 그림마당 민에서, 술에 취한 나는 다과 테이블을 붙잡고 울었다. 백 선생님의 언짢아하는 눈길이 느껴졌고,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홍선웅 형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대망의 대선 출정식 자리에 내가 재를 뿌렸으니 말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나는 뺨 맞을 각오를 하고 기자촌 선생님 댁을 찾았다. 정월 초하루 세배를 올리고 눈치를 보면서 앉았더니, 의외로 선생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알고 보니 선생의 아들 백일 씨 부부가 연말에 손주를 낳아 안겨드렸다는 것이다. 십년감수한 1993년 정초였다.

1980~1990년대, 선생은 문화운동판의 독전관이었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야 한다면서 선생은 장산곶매, 이심이, 썽풀이, 너울네, 새뚝이, 곧은목지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예술가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셨다. 너울네는 이기연 누이가 잘 그렸고, 이심이는 강요배 형이 잘 그렸고, 새뚝이는 신학철 선생이 잘 그렸다.

나는 선생이 주창하고 신학철 선생이 이어받은 백기완 미학의 핵심은, 동학의 '사인여천'과 '향아설위'에 맞닿아 있다고 본다. '사인여천'은 일하는 사람(민중)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가르침이겠고, '향아설위'는 내 안에 우주가 다 들었으니 내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말이겠다. 불교미학으로 말하자면 선생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였다.

선생은 내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는 것을 마땅찮게 생각했다. 혁명하는 새뚝이가 되랬더니 눈 먼 월급쟁이가 되었으니까. 2021년 2월, 내가 민기사를 퇴직하자마자 선생이 돌아가셨다. 황천길에는 주막집도 없다던데 그날 밤에는 누구 집에서 쉬었다 가셨는지 모르겠다.

저승에서 장자, 동방삭, 이태백, 오윤, 김용태 형과 복사꽃 그늘 아래서 술판이라도 자주 벌이셨으면 좋겠다. 노시다가 해라도 저물면 "이놈의 해야! 어른들이 노는데 니 놈이 감히 떨어져!!" 호통을 칠 것이다.

선생을 모란공원에 묻고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붉은 노을이 장엄했다.

 2025년 백기완재단 <신학철 그림전시 이야기 마당>에 함께한 이종률
2025년 백기완재단 <신학철 그림전시 이야기 마당>에 함께한 이종률 ⓒ 채원희

#백기완#이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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