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상자에 던져진 눈
- 박승민
눈은 고공(高空)의 공포로 휘청거렸다
말문이 막힌 채
상경하는 기차에서 몸을 던지듯
무작정 공단 앞에 뛰어내렸다
생각할 틈도 없이
뒤에서 떠미는 물량에 치여
상자에 내던져진다
아, 그런데 이 벼랑은
어느 날엔가 와본 듯해
누군가와 살아본 듯해
몸이 더 잘 얼 수 있도록
상자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재고가 쌓이는 겨울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닫힌 공장을 나서는 언니도
겨울옷을 입고 봄 속에서 녹아가겠지
겨울이 흘린 흔적을 찾느라
꽃밭의 눈들은 발갛게 부어가겠지
출처_시집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 창비, 2024
시인_박승민 :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상자에 던졌다.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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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의 공포"는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삶의 조건이다. 선택권은 없고 떨어질 수밖에 없는 높이에서 눈은 상경하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눈은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고 쉽게 대체되고 밀려나는 존재, 도시로 올라와 공단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다. 준비 없이 밀어닥치는 "물량"에 치여 살아남기 위해 맨 꼭대기로 올라가는 소외된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재고가 쌓이는 겨울까지"뿐이다. 눈은 버티지 못하고 떠난 언니를 떠올린다. 어딘가에서 겨울을 흘리며 녹아갈 언니의 상처를 생각한다.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눈"처럼 쌓이고, 얼고, 녹아 사라지는가. 붉어진 눈으로 언니를 찾듯, 이 시는 그 자리를 둘러본다. (우은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