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 3.15 민주 묘지에서 현대사 동아리 아이들이 희생 영령에 대해 묵념을 올리고 있다. ⓒ 서부원
"이럴 거면 굳이 세금을 들여 기념물을 왜 만들었을까요?"
한 아이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비단 이곳의 이 인물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십수 년 동안 시민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면서 이따금 튀어나오는 이런 질문이 인솔자로서 가장 당혹스럽다.
지난 1월 3일 현대사 동아리 답사 때다. '5.18 민주화운동의 뿌리, 4.19 혁명'이라는 주제로 경남 창원으로 겨울 정기답사를 다녀왔다. 특례시로 통합되기 전 마산 지역으로, 지금의 행정구역 명칭은 마산합포구다. 4.19 혁명을 촉발한 3.15 의거의 발원지로서, 명실상부 민주화의 성지다.
광주의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3.15 의거를 넘어 4.19 혁명의 상징적 존재가 된 김주열 열사의 자취가 또렷하기 때문이다. 전북 남원 출신인 열사가 경남 창원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로 우뚝하니, 이른바 영호남을 잇는 매개로써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의 자취를 찾아나섰는데
교과서에서 강조되는 내용이다 보니 열사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은 없지만, 답사 전엔 모두 그가 마산에서 나고 자란 걸로 알았다. 마치 전라도와 경상도를 오가기 힘든 다른 나라처럼 여겨온 것이다. 그렇듯 경상도 지역 답사는 주제가 뭐든 아이들에게 '부수적' 효과를 낸다.
이번 답사는 김주열 열사의 가묘가 자리한 국립 3.15 민주 묘지와 그의 모교인 용마고등학교(옛 마산 상고)를 거쳐 시신 인양지를 답사하는 동선으로 꾸렸다. 돌아오는 길, 전북 남원에 있는 그의 생가와 묘소를 참배하며, 5.18이 4.19와 3.15에 가닿아 있음을 깨닫도록 구성했다.
마산 시내 어딜 가든 그는 '주인공'이었다. 기실 그는 당시 마산 상고의 합격 통지서만 받았을 뿐 학교에 다닌 적은 없지만, 교문 옆에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시신을 인양한 곳엔 황금색 동상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는 광장까지 조성해 놓았다.
여기서 답사를 마무리하고 돌아섰다면 난감한 질문을 받을 일이 없었다. 문제는 이왕 마산까지 온 김에 몇 해 전 건국훈장을 수훈하며 화제가 됐던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의 자취를 찾아 나서다 돌발상황에 직면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주소만으론 찾기가 여간 만만치 않았다.
명색이 현대사를 전공한 교사라는 게 무색하게도 이태 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했다는 뉴스를 접하기 전까진 이름조차 몰랐다. 이후 그의 생애를 다룬 책이 출간되고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제작됐다는 소식을 듣곤 언젠가 고향인 마산에 가면 그의 자취를 찾아 나서리라 마음먹었다.
동아리 답사의 주제와 지역이 마산으로 결정되면서 기회가 닿았고, 부러 짬을 내 아이들과 함께 김명시 장군의 자취를 찾았다. 아이들은 그의 이름 앞뒤에 붙은 수식어에 흥미로워했다. 그들은 '백마를 탔다'는 것과 '장군'이라는 단어를 여성 독립운동가와 쉬이 연결하지 못했다.
"기념물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적 사건이든 인물이든 그 의미가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면, 길가의 거치적거리는 물건 정도로 인식될 수 있다. 미래세대인 너희들의 몫이자, 우리가 부러 시간을 내어 이 먼 곳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다."
모범정답이긴 하지만, 기성세대로서 뒤통수가 따가울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해야 할 역할을 애꿎은 아이들에게 떠넘기는 듯한 말이어서다. 더욱이 당일 골목골목 기념물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위치를 알려주기는커녕 있는지조차 모르는 시민들이 대다수여서 적이 민망했다.
"대한민국 현대사가 켜켜이 쌓인 곳인데"
장군이 어릴 적 고향 집에서 학교를 오가던 길을 '김명시 장군 학교길'로 명명해 지정했다는 소식도 접했던 터다. 국권피탈 직전인 1907년 그가 태어난 곳은 '마산부 만정 189번지'로, 지금의 오동동 문화광장 자리다. 다녔던 학교는 마산공립보통학교로, 지금은 성호초등학교다.
마산 구도심인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성호초등학교로 가는 꾸불꾸불한 골목길에 부러 장군의 이름을 붙인 감각이 돋보인다. 그 길가에 안내판을 세워두고 곳곳에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벽화까지 그려놓았다. 그들이 쏟은 정성과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막상 가보면 빛나는 장군의 생애에 놀라고,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라는 자긍심을 북돋울 수도 있을 법도 한데, 시민들의 관심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흔적을 찾는 질문에 엉뚱하게 3.15나 부마 민주항쟁의 기념물로 안내하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주변의 열 명도 넘는 시민에게 물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정작 우리의 손을 이끌고 데려다 준 이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기념품 가게의 젊은 상인이었다. 그도 그곳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우리를 안내했다. 김명시 장군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말했다.
기꺼이 길잡이가 돼준 그분 덕분에 마산 구도심에 남아 있는 장군의 자취를 꼼꼼하게 답사할 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건넸더니, 그는 되레 우리들 덕분에 고장의 역사 인물을 알게 됐다며 고마워했다. 여하튼 알게 됐으니, 주변 지인들에게 뽐내듯 알려야겠다고 웃어 보였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켜켜이 쌓인 곳인데, 두루뭉술하게 '문화광장'이 뭐예요."
한 아이는 장군의 생가터인 오동동 문화광장이라는 이름을 문제 삼기도 했다. 기실 광장 입구에는 부마 민주항쟁 기념물이 세워져 있고, 채 10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3.15 발원지 표지판도 있다. 3.15 당시 민주당사가 있던 자리로, 지금은 3.15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소녀상도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다. 마산 지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 운동, 나아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두루 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다. 아이의 주장대로라면, '문화'라는 말보다 '민주'와 '인권', '역사'의 의미를 담는 명명이 더 적확하다는 거다.
'김주열 열사'의 도시에 숨겨진 또다른 영웅
지난 2022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한 직후 부랴부랴 조성된 것이라 시민들이 낯설어하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극심한 이념 갈등 속에 희생되어 거론조차 금기시됐다. 그는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에서 의문사했고, 지금껏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렵사리 찾아낸 그의 자취 앞에서 아이들의 질문은 꼬리를 물었다. "정말로 말을 타고 독립 전쟁을 치렀느냐"는 유치한 것부터 "열혈 공산주의자인데도 왜 북으로 가지 않고 남쪽에 머물렀느냐"는 내용까지 다양했다. 교사로서 명쾌한 답변을 할 수 없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길에서 헤매느라 적잖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부러 찾아가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라면 오로지 유관순 열사만 떠올리던 아이들에게 김명시 장군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적어도 여성은 남성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던 존재라는 편견 만큼은 확실히 깨졌다.
"마산을 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김주열 열사의 그늘에 김명시 장군이 가려진 느낌이 들어요."
마산에서 열사의 이름과 자취를 너무 많이 보고 들은 까닭일까. 3.15와 4.19가 마산의 오랜 역사를 대표하는 걸 넘어 지역의 수많은 다른 사건과 인물의 흔적을 덮어버리는 것 같다는 소감이었다. 마산의 남북을 관통하는 도로 이름부터가 '3.15 대로'라며 나름의 근거를 댔다.
어쩌면 이는 "이럴 거면 세금 들여 기념물을 왜 만들었냐"는 질문에 대한 아이들끼리의 자문자답이 될 수도 있다. 부러 우리가 장군의 자취를 찾아왔듯, 이후 또 다른 누군가가 찾아오고 그렇게 찾는 이들이 시나브로 늘다 보면, 김명시 장군도 김주열 열사 만큼의 명성을 얻지 않겠느냐고 둘러댔다. 그러자 한 아이는 이렇게 반문하며 답사를 매조지었다.
"지금은 덩그러니 서 있는 기념물들이 그땐 제 몫을 하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