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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주 많이 내린 어제 아침, 저는 동네에 있는 예쁜 산수유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시인 김종길의 <성탄제>라는 시가 문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붉은 산수유 열매에 흰 눈이 소복했는데요. 아름다움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한에 걸음을 옮긴 노동의 가치를 사진 한 장이 웅변해 주었다고나 할까요.

▲산수유 열매우리 동네에는 꽤 커다란 산수유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지난 2일 아침 산수유 붉은 열매에 흰 눈이 소복히 쌓여 고운 자태를 뽐냈습니다. ⓒ 신정섭
저는 교직 30년이 다 되어가는 교사입니다. 겨울방학이지만 지난달에는 거의 매일 학교에 출근했습니다. 새 학년 수업 준비, 학교운영위원회 업무 처리, 새 학년 담임 배정과 업무분장 심의 등으로 나름 바빴는데요. 오늘은 작정하고 도서관으로 '출근'했습니다.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공공도서관이 있다는 건 정말 행운입니다. 도서관에 가려면 먼저 은행에 들러 돈을 찾아야 하는데요. 도서관 구내식당에서는 현금으로 값을 치러야만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 원짜리 한 장 손에 쥐고 힘차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서고를 돌아다니며 책을 읽다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앗, 점심시간이 다 됐구먼...' 생각이 들어 지하 1층 구내식당으로 급히 내려갔는데요. 이미 수십 명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곳 갈마도서관에서는 4천 원에 밥을 먹을 수 있어 경쟁이 치열한 편이거든요.

▲공공도서관 점심 식단대전 서구 갈마도서관 구내식당에서는 단돈 4천원으로 집밥이나 다름이 없는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 신정섭
오늘 점심 메뉴로는 봄동된장국에 고등어구이, 어묵메추리알조림이 나왔습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저는 십 분 만에 뚝딱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어제 건강검진 대장내시경에서 용종(물혹, polyp) 두 개를 제거하는 바람에 종일 굶어 배가 엄청 고팠었나 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밥을 먹는 사람들 표정이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단돈 4천 원으로 이렇게 맛난 식사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곳은 비영리 단체급식이라 신용카드나 계좌이체가 안 됩니다. 덕분에 직접 은행도 가보고 건강한 일상이 만들어집니다.

▲도서관 주간식단표갈마도서관 주간식단표를 보면,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4천원에 즐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 신정섭
영양사 한 분과 조리 노동자 두 분이 열심히 준비한 식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식단이 달라지는데, 대전 서구 평생학습원에 낸 채용 공고를 보니 취사 보조 기간제근로자는 하루 8시간 근무에 9만 원 조금 넘는 돈(4대 보험 포함)을 받더라고요.
'월급을 훨씬 많이 받는 내가 교사로서 그분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에는 이렇게 노동의 가치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동네에 매일 폐휴지를 줍는 아주머니가 계시는데요. 어떤 날은 하루 5천 원 벌기도 쉽지 않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도서관 점심 한 끼 4천 원보다 비싼 음료를 마시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에 3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셨어요.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복이 7천 원짜리 두바이쫀득쿠키 하나 먹는 것보다 열 배는 더 크다고 여겨졌습니다.
잠시 산책하고 도서관으로 돌아와 함민복 시인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시집을 읽었는데요. 그 가운데 '긍정적인 밥'이라는 시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세상에는 시장의 원리로 매겨진 '값'과 우리가 가슴으로 느끼는 '가치'가 따로 있다는 생각에 뭉클해졌습니다.
긍정적인 밥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 함민복의 시 <긍정적인 밥〉 중에서 -
오늘 저는 단돈 7천 원으로 일과 노동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습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학하면 아이들에게 노동의 가치를 목소리 높여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민주시민교육은 교과서에 활자로 있는 게 아니라 건강한 일상의 다른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