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눈이 많이 온 날. 아침에 일어나니 재난 문자도 몇 개나 와 있길래 긴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생각과 달리 아파트 내의 눈이 다 정리되어 있다.
"이제 거의 다 했어."
하는 경비 아저씨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도서관에 가야 했는데 도서관 입구 경사가 가파른 편이다. 올라가다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눈 온 날 저녁, 한강 러닝 코스눈온 날 저녁 한강 러닝 코스. 주로에는 눈이 없다. ⓒ 김지은
눈 온 날 당일에 달리러 나간 적은 없었는데, 괜히 한강 길도 다 치워져 있을 것만 같아 오후 다섯시 쯤 뛰러 나갔다. 곳곳에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었다. 염화칼슘과 아침부터 이 길을 뛴 러너들의 발자국이 길을 내준 덕분에 수월하게 뛸 수 있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해준 경비 아저씨와 도서관 직원, 그리고 공무원들 덕에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고 잘 다닐 수 있었다.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선(善)을 베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끝에 며칠 전 다녀온 경주 여행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훌륭했던 여행
지난 주말, 친구 두 명과 함께 경주에 다녀왔다. 경주는 시댁 근처라 몇 번 가봤지만, 숙소 근처만 둘러보는 게 전부여서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지인들에게 경주의 맛집과 카페, 핫플레이스에 대한 정보를 한가득 얻고 나니 떠나는 길이 무척 든든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오랜만에 방문하게 될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 첨성대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렜다.
30년 만에 방문한 불국사의 경내가 생각보다 좁아서 놀랐다. 화려한 다보탑과 정제된 세련미의 석가탑이 불국사 경내를 꽉 채웠다.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었을까?"
"그러게. 정말 대단하다."

▲불국사 경내의 석가탑과 다보탑30년만에 다시 본 석가탑과 다보탑. ⓒ 김지혜
우리는 첨성대에서도, 경주박물관에서 신라 시대의 금관을 보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노고와 정성 덕분에 지금까지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보며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지인들이 추천해 준 맛집은 또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른다. 분명 식사 전에는 그렇게 배고프지 않다고 했는데, 우리는 모든 접시를 깨끗하게 싹 비웠다. 여자 셋이 메뉴 네 개는 좀 과하지 않냐고 말했던 게 무색했다. 나올 때는 그곳에서 만든 다시마 식초까지 몇 개씩 사서 나왔다.
지인이 추천해준 식당 중에 '한우물회'가 유명한 식당도 있었는데 선뜻 내키지 않았다. 경주에 가기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메뉴였다. 막상 경주에 도착해서 돌아다녀 보니, 많은 식당에서 '한우물회' 메뉴를 내걸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경주의 특산 음식이라면, 한 번쯤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지인 추천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4인분을 시켰는데 역시나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한우물회는 우려와는 달리 매우 고소하고 맛있었다. 지인들이 추천해 준 모든 식당이 훌륭했고, 우리는 방문한 모든 식당에서 아주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다.
가장 좋았던 장소

▲오아르미술관 2층 전시실미술 작품과 고분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다음에 간다면 더 길게 머물고 싶은 장소. ⓒ 김지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는 '오아르미술관'이었다. 건축가 유현준이 건축한 미술관으로 지난해 4월 1일 개관하였다. 경주 대릉원 고분 앞에 있어 미술 작품과 고분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아주 특별한 장소다. 커다란 통창으로 보이는 오래된 고분과 현 시대의 작품을 동시에 보며 과거와 현재를 생각했다. 내가 머무는 이 순간이 찰나이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 중 가장 긴 시간 머물렀던 장소다.
다녀와서 유현준 건축가의 유튜브에서 미술관을 소개한 영상을 봤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가진 힘을 어떻게 미술관에 잘 적용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있었고, 건축 자재와 가구의 형태까지 세심하게 선별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와 건축사무소 직원들의 많은 고심과 노력으로 나의 하루가 풍요로웠음을 느끼고 감사했다.
여행 내내 요리사 분들, 건축가 분들, 과거의 석공과 기술자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기 일을 성실히, 열심히 하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열심히 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 혹은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일지라도 그 일을 대충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개관 시간에 맞춰 서둘러 도서관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비록 내 일을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아직은 타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미래를 위한 것일지라도, 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오아르미술관'에 가서 풍요로움을 경험한다면, 그게 아주 조금은 나의 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오아르미술관 2층 전시실동그란 의자에 앉아 바로 앞의 고분만 감상할 수도, 그 옆의 미술작품과 고분을 함께 감상할 수도 있다. 통창으로 보이는 고분이 꼭 파노라마 액자 속 작품같다. ⓒ 강효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