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시의회 자료사진. ⓒ 울산시의회 제공
학창 시절, 우리는 누구나 별명 하나쯤은 갖고 살았다. 애정이 담긴 애칭도 있었지만, 대개 별명은 상대의 약점을 포착해 낙인찍는 도구였다. 최근에는 이 별명을 부르는 행위 자체가 학교폭력의 한 유형으로 다뤄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 사이의 권력 관계를 규정하는 언어적 장치다. 별명이 싫어 부모가 지어준 이름조차 버리고 개명을 선택하는 이들의 마음속엔, 타인이 규정한 '나'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처절한 자기 선언이 담겨 있다.
울산, 노동의 심장에서 들려온 불협화음
개인에게 이름이 중요하듯, 사회적 집단에게도 이름은 정체성의 핵심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노동(Labor)'이라는 당당한 이름 대신 '근로(Effort)'라는 말을 강요받아 왔다. 그런데 2026년 1월, 대한민국 산업화의 중심지이자 노동운동 역사를 품은 울산에서 우려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울산시의회 교육위원회가 교육청 조례 속 '노동'을 다시 '근로'로 되돌리는 조례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2021년과 2022년, 노동의 존엄을 찾기 위해 어렵게 바꿔놓았던 이름을 다시 지우겠다는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니다. 행정적 비용이나 익숙함을 이유로 드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언어의 본질보다는 낡은 시대의 편견에 가깝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유령이 다시 배회하기 시작한 셈이다.
근로라는 굴레와 노동이라는 날개
언어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그 현실을 규정하는 틀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근로'를 부지런히 일하는 상태로, '근로자'는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반면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주체적 행위로, '노동자'는 법형식적으로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는 주체로 규정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노동자'가 자본가와 대등한 계약의 주체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근로'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동적 복종을 요구한다면, '노동'은 대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Arbeit'나 국제노동기구(ILO)가 사용하는 'Labor'는 모두 주체적 행위를 전제한다. 반면 우리가 관성적으로 써온 '근로(勤勞)'는 일제강점기 국가와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조하던 시절의 잔재다. 이 낡은 단어를 21세기 민주공화국에서 부활시키는 것은 언어적 퇴행을 넘어 시대정신의 후퇴와 다름없다. 근로는 국가가 시민에게 씌운 멍에였고, 노동은 시민이 주권자로서 펼치는 날개다.
이 퇴행을 주도한 이들은 헌법 제32조의 '근로의 권리'를 방패로 삼는다. 하지만 법은 박제된 문구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시대의 정신을 담아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하는 유기체다. 현행 헌법은 1987년 체제의 산물이며, 그 이후 노동의 현실과 인식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지난 2025년 9월, 국회가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기로 합의한 것은 그 변화의 시작이었다. 중앙정부와 국회가 노동을 인간다운 삶을 위한 권리로 재정립하려 할 때, 울산시의회는 홀로 과거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을 낡은 문구에 가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 '노동'이어야 하는가
나는 30여 년간의 직업계고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직업계고에서의 노동인권 교육에 관한 연구'(2022)를 수행했다. 이 연구에서 확인한 사실은 명확하면서도 서글펐다. 연구 결과,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못할 때 아이들의 자존감 점수는 유의미하게 낮아졌다. 학교 현장에서 노동인권 교육이 '노동'이라는 제 이름을 찾지 못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본의 도구'나 '수동적 객체'로 인식하게 된다.
노동인권 교육은 단순히 법규를 외우는 시간이 아니다. 노동자가 사회의 당당한 주체임을 깨닫는 '정치적 자각'의 과정이다. 직업계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법'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주체성'이다. 울산시의회의 결정은 아이들에게서 이 주체성을 다시 빼앗아, 그들을 '말 잘 듣는 노동력'으로만 길러내겠다는 위험한 발상과 맞닿아 있다. 연구 데이터가 보여주듯, 용어의 선택은 학생들의 자아 정체성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나는 서울로봇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늘 강조한다. "여러분은 시키는 대로만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으로 세상을 바꾸는 주체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고. 실제로 아이들은 '근로자'라는 말에서 종속적인 느낌을, '노동자'라는 말에서 당당한 주체의 자부심을 느낀다. 울산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의 거대한 엔진을 돌린 것은 '부지런히 일한 객체'가 아니라, 자신의 땀과 기술로 국가 경제를 지탱해온 '당당한 노동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야 할 의무가 있다.
아이들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
행정적 편의나 과거에 대한 익숙함이 진보를 가로막는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우리 아이들이 발을 딛고 선 지역의 조례만 과거에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교육자로서 나는 우리 학생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근로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당당한 '노동자'로 사회에 진출하길 바란다.
울산시의회가 본회의에서 이 조례안을 부결시키고, 교육청이 아이들의 권리를 위해 끝까지 목소리를 내주길 촉구한다. 낡은 유령을 박물관으로 보내고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주는 일, 그것이 33년 차 교육자인 내가 '근로'라는 유령에 맞서 이름을 지키려는 이유이다.
뜨거운 쇳물을 토해내며 만든 문명의 이기를, 그 노동자의 존엄을 부정하며 누릴 수는 없다는 가수 하림의 노래 '그 쇳물 쓰지 마라'처럼, 노동을 지워버리려 애쓰는 울산시의회 위정자들에게 묻고 싶다. 노동의 땀방울이 만든 세상에서, 노동의 이름을 지우고서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 노동자들은 '근로'라는 원치 않는 별명을 버리고 '노동'이라는 제 이름을 찾기 위해 헌법적 개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 집의 문패를 '근로'에서 '노동'으로 바꾸는 일은, 단순히 글자 두 개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땀 흘려 일하는 인간의 영혼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며, 우리 아이들이 이 사회의 당당한 주인임을 공인하는 의식이다. 울산시의회는 유령을 불러낼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노동의 가치를 경배해야 마땅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