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값 사상 최고치 뉴스에 '집에 있는 금 생각'이 간절합니다.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뿌듯하고. 저마다 갖고 있는 금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남편이 전기기능사 필기시험을 보러 가던 날,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는 사실 혼자서는 외출이 불안한 상태다. 혼자 걷다 사물이나 사람에 부딪혀 넘어지면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다. 3번의 암 수술을 하고 쿠싱증후군으로 부신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척추압박골절과 다발성미세골절도 앓았다. 림프부종으로 종아리를 잃을 뻔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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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골절은 지금도 진행 상태라 골절 이후 키가 14cm가 줄었다. 어딘가 조금만 부딪혀도 골절이 일어난다. 하지만 예순이 넘어 국가자격증 시험을 보러 가는 남편을 배웅한 뒤 집 대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연일 치솟는 금값과 관련한 뉴스를 꼼꼼히 봐두었다가 금을 팔러 가는 길이다.
'다 팔고 어찌어찌 이거 하나 남았네...'
18K 다섯 돈짜리 팔찌 하나가 내 손에 야무지게 쥐어졌다. 연명치료는 거부권을 행세할 수 있어 거부하였는데, 녹록지 않은 삶은 마음대로 거부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연명해야지.
다시 팔게 된 금

▲지난 몇 년간 나의 병치레로 통장이 바닥나고 있음을 남편에게 말하지 못한다. ⓒ gabriellasofficialphotography on Unsplash
생각해보니 과거에도 나는 금을 팔았다. IMF시절 온 나라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남편이 직장을 잃었고, 작은 가게를 열어 하루하루 힘든 상황이었고, 젖먹이 둘째가 있었다. 결혼 전 엄마가 장만해 주었던 18K 액세서리들, 결혼하면서 서로 반지 하나씩만 하기로 하고 장만하였던 결혼반지, 그리고 아이 둘 자라 성인이 되면 건네 주려했던 돌 반지 여럿을 모두 내다 팔았다.
아이 우유를 사고, 딸 아이의 줄줄이 비엔나를 샀다. 남편이 수입이 생길 때까지 생활비로 아껴 썼다. 20여 년 전 상황이 다시 되풀이 되듯 이번에도 생활고 때문에 마지막 남은 금붙이를 팔러 간다. 그것도 남편이 알면 속상할 테니, 몰래 안전사고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집을 나선 것이다.
어제 문득 남편이 말했었다. 신문 정기구독을 끊어야겠다고. 4년 전, 남편은 정년 퇴직을 하였다. 21년간의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가장 첫 바람은 종이신문을 구독하는 일이었다.
아침이면 집으로 배달된 종이 신문을 훑어 본 후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했다. 어려울 리 없었다. 조간으로 중앙지 한부를 신청하니, 덤으로 지역신문 한부도 함께 보내주었다. 남편은 그렇게 따뜻한 커피와 종이 신문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암 진단을 받고, 암 수술을 받고, 척추압박골절로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되자 남편은 바빠졌다. 남편의 하루 24시간 전부가 나만을 위해 쓰였다. 암 후유증으로 림프부종이 오고 림프액이 몸 밖으로 샐 적에는 성인용 기저귀를 들고 다니며 나의 종아리에서 새고 있는 림프액을 조처해주었다.
배우자로서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들을 남편은 나에게 해주었다. 그동안 하루치의 종이 신문들은 냄비 받침이 되거나 차곡차곡 모아져 시골 엄마 댁으로 보내졌다. 시골에는 종이신문의 쓰임이 많다고 하여서다. 그런데 남편이 신문 정기 구독을 끊어야겠다고 했다. 생계 때문이다.
남편과 나눌 따뜻한 차를 준비해본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 ⓒ enamoradaaa on Unsplash
생계 때문에 남편은 전기 기능사 국가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러 간다. 나는 차마 지난 몇 년간 나의 병치레로 통장이 바닥나고 있음을 남편에게 말하지 못한다. 나로 인해 퇴직 후 남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에도 로봇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직종에 전기기능사도 들어가"라고 남편이 말했다. 마침 남편은 전기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이 예순이 넘어 생애 첫 국가자격증을 준비하는 남편을 보면서 암을 앓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우월감 보다는 죄책감이 먼저 들었다. '뭐라도 해야지' 생각 끝에 당근마켓을 뒤지고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한두 시간 움직이면 여지없이 몰려드는 통증으로 민폐가 염려되어 선뜻 전화 문의를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합격을 기원하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길을 걷는다. 종이신문 정기 구독을 끊고,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다섯 돈짜리 팔찌를 팔아 통장을 채웠다. 비록 금을 팔았던 과거와 지금 우리의 살림살이가 마치 거울을 보듯 똑같아서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때보다 더 진하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아주 잘못 산 삶은 아니라 자평하면서.
남편이 돌아오기 전 집에 도착하였다. 힘들게 고생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함께 나눌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