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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편집자에게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를 그리게 된 이유'를 써보는 것도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겸사겸사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갖을 겸,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써보기로 했다. 처음엔 그저 쉬어가는 글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타이핑을 시작하니, 오래된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함석헌 기념관 씨알갤러리에서의 개인전2022년 도봉구에 있는 함석헌 기념관 씨알갤러리에서 일러스트 엽서와 회화를 같이 전시하였다. ⓒ 주환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를 그리기 시작한 건 지난 2012년 일본 유학 시절이었다. 더 정확히는 유학생 신분을 벗어나 일본에서 일을 하던, 일본 생활의 막바지 때다(일본 유학은 2008년부터였다). 그 시기엔 디자인을 계속할지, 좋아하던 그림으로 방향을 틀지 고민하던 터였다. 그러던 중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인물화 연습을 하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그려보자.'
이 찰나의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처음엔 스케치와 드로잉으로 시작했다. 드로잉은 자연스럽게 유화로 옮겨갔고, 그림을 그리며 어느샌가 내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관심은 점점 넓어졌다. 한 인물의 삶에서 독립운동사로, 한일 근대사로, 더 멀리 동아시아의 역사로 이어졌다. 일본에서 살고 있었기에 일본 사극과 근대사 자료도 닥치는 대로 찾아보았다. 역사를 바르게 보기 위해선 상대의 시선 또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창호와 김구김구의 그림은 현재 김용만의원이 소장하고 있다. ⓒ 주환선
2013년 10월경 귀국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처음엔 외로운 작업이었다. 알아주는 사람도,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관련 지식이 하나도 없었다. 혼자 허공에 외치는 듯한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광복절 그룹전에 초대받았고, 그것이 전시 활동의 첫 시작이 되었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걷다보니 한국에서 한 개인전은 8회가 되었다.
유화 작업에서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나의 감정을 추상적으로 담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일러스트 작업을 병행했다. 일러스트에서는 가능한 한 해석을 배제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덜 알려진 인물들을 세상에 정확히 알리기 위해선 그들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업은 조용히 쌓였고, 블로그에 한 명씩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후손과 단체로부터 연락이 오고, 이따금 의뢰와 협업의 기회가 이어졌다.

▲LGU+ 와의 협업2023년 당연하지 않은 일상 시즌4 <문화로 독립을 외치다> 일러스트제작을 했다. ⓒ 주환선
일러스트로 그린 인물이 200명을 넘었을 무렵인 2023년 11월, 출판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그림만 제공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편집자는 글도 직접 써주길 원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책 작업이 시작됐다.
책에는 가능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담으려 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모두가 아는 몇몇 인물도 필요했다. 그래서 대표적인 인물과 함께, 이들과 연결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함께 구성했다. 문일민, 최능진, 이화림, 김기도, 민필호 같은 이름들은 기존 어린이 독립운동가 책에서는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분들이었다. 또 메리 스크랜턴, 패트릭 도슨, 루이 마랭처럼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도 포함시켰다.
1년간 책 출판 작업을 마친 뒤, 2024년 11월 나는 미국으로 왔다. 아내가 미국인이고,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출국 전 몇몇 작품을 독립운동가 후손과 기념사업회에 전달했다. 그들이 더 잘 보관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광복 80주년이던 2025년 8월 출판되었고 '2025 하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로 추천되었다.

▲<초등학생이 꼭 알아야할 독립운동가 100인> 바이킹 출판사초등학생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 바이킹
개인적으로 너무 뜻깊은 일이었고,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한 장 한 장 그린 얼굴들이, 누군가의 손에 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지금 나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작은 도시, 집 방 한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마주하며 여러 스타일로 작업하고 있다. 새로운 회화 시리즈와 다른책도 준비중이다. 아직은 영어가 서툴지만 언젠가 영어판 출간도 하고 싶다. 또 이곳에서의 개인전도 하나의 목표로 삼고 있다.
"왜 하필 독립운동가를 그리는가" 사람들은 묻는다. 초기에는 이유가 두 가지였다. 아무도 모르는 이름을 단 한 사람에게라도 알리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조용한 보답.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미국에 온 뒤 혼자 공부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늘면서, 이유들이 간결하고 가벼워졌다.
"그냥 해야할 일."
가끔 방향을 잃을 때도 있지만, 목적지는 변하지 않는다. 늘 떠올리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처럼, 묵묵히 한 삽 한 삽 산을 옮기듯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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