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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이야기 벽의 끝인 추방 출발 데크(Exclusion Departure Deck) Bainbridge Island Exclusion Memorial은 아이다호 주에 위치한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 유적지, Minidoka National Historic Site와 함께 국립공원관리청(NPS)에서 연계 사적지(site extension)로 관리하고 있다. Minidoka National Historic Site는 베인브리지 섬에서 추방된 일본계 미국인들이 Camp Harmony(워싱턴주 퓨얄럽의 임시 집결소)와 Manzanar(수용소)에서 10개월 감금생활을 한 뒤 최종적으로 수용된 곳이다.
이야기 벽의 끝인 추방 출발 데크(Exclusion Departure Deck)Bainbridge Island Exclusion Memorial은 아이다호 주에 위치한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 유적지, Minidoka National Historic Site와 함께 국립공원관리청(NPS)에서 연계 사적지(site extension)로 관리하고 있다. Minidoka National Historic Site는 베인브리지 섬에서 추방된 일본계 미국인들이 Camp Harmony(워싱턴주 퓨얄럽의 임시 집결소)와 Manzanar(수용소)에서 10개월 감금생활을 한 뒤 최종적으로 수용된 곳이다. ⓒ 이안수

진주만 공격 후 미국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지난 1월 13일, 미국 워싱턴주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의 '베인브리지 섬 일본계 미국인 강제 이주 기념관(Bainbridge Island Japanese American Exclusion Memorial)'을 방문했다.

이곳은 1942년 3월 30일 웨스트 코스트에서 처음으로 강제 이주된 276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중 3분의 2가 미국 시민. 강제 이주된 일본계 주민 가운데에는 완전한 미국 체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Nidoto Nai Yoni)"을 모토로 설립된 곳이다. 2011년 8월에 개관한 곳으로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의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라는 윤리적 다짐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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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 19일 군사 구역에서 일본계 미국인을 배제할 수 있게 하는 9066호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 행정명령에 따라 이곳 베인브리지 섬에서 276명의 일본계 주민이 무장한 미군 병사들에 의해 각자 한 개의 여행 가방만 허용된 채 이글데일 페리 부두(Eagledale Ferry Dock)로 강제 집결된 뒤, 시애틀로 가는 페리에 태워져 섬에서 쫓겨났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의 만자나르 강제 수용소(Manzanar War Relocation Center)에 수용되었다가 아이다호의 미니도카 강제 수용소(Minidoka: An American Concentration Camp)로 이송되었다.

이 행정명령은 일본 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습한 '진주만 공격' 이후 발령되었다.

'베인브리지 섬 일본계 미국인 강제 이주 기념관'의 이야기 벽 야외 기념관은 이야기 벽으로 이루어졌다. 276피트 길이의 적삼나무와 화강암 벽에 추방자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고 5개의 테라코타 프리즈(Terracotta Frieze)가 이민·포용·추방·수용·귀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베인브리지 섬 일본계 미국인 강제 이주 기념관'의 이야기 벽야외 기념관은 이야기 벽으로 이루어졌다. 276피트 길이의 적삼나무와 화강암 벽에 추방자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고 5개의 테라코타 프리즈(Terracotta Frieze)가 이민·포용·추방·수용·귀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이안수

1941년 12월 7일에 이루어진 진주만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다음날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치욕의 날(Day of Infamy)' 연설과 더불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 내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 정책이 시행되었다. 베인브리지 섬에서의 일본계 주민 강제 이주는 미국 서부 해안에서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이 시작된 첫 사례로, 이후 12만 명 이상이 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가장 낯선 적

"일본인은 미국이 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가운데 가장 낯선 적이었다."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의 첫 문장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전쟁정보국의 요청으로 1944년 일본 문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뒤, 1946년 그 결과가 담긴 이 책이 발간되었다.

일본이라는 타자가 갑자기 적이 되어 공격해왔을 때 미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들에 대해 당혹감과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그 공포는 일본계 미국인(약 12만 명. 이 중 8만 명 이상이 미국 태생의 시민권자, 나머지는 이민 1세)들을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고 강제 격리 조치를 시행하는 발단이 되었다.

추방자들은 번호표를 달고 사막의 수용소로 이송되어 자유가 박탈된 채 철조망 안에서 무장 경비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미국 정부의 잘못된 조치에 대한 인정과 사과 "여기 우리는 잘못을 인정합니다. 여기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한 정의에 대한 국가로서의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합니다." _로널드 레이건, 1988년 '시민 자유법(Civil Liberties Act) 서명식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과 그 가족들에게 부당하게 기본적 자유를 박탈한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_빌 클린턴, 1993년 대통령 사과 서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조치에 대한 인정과 사과"여기 우리는 잘못을 인정합니다. 여기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한 정의에 대한 국가로서의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합니다." _로널드 레이건, 1988년 '시민 자유법(Civil Liberties Act) 서명식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과 그 가족들에게 부당하게 기본적 자유를 박탈한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_빌 클린턴, 1993년 대통령 사과 서한 ⓒ 이안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강제 이주 명령이 해제되자, 베인브리지 섬에 살던 이들의 절반 이상이 섬으로 돌아왔다. 빈손으로 귀환했지만 재산 대부분이 몰수되거나 파괴된 뒤였다.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간첩과 배신자라는 사회적 낙인으로 재정착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랐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 만들어진 차별적 조치였던 강제 이주 명령에 대해 1980년대에 들어서 미국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시민자유법(Civil Liberties Act, 1988년)'을 통해 공식 사과와 함께 생존자 1인당 2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여기 우리는 잘못을 인정합니다. 여기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한 정의에 대한 국가로서의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합니다."_로널드 레이건, 1988년 '시민 자유법(Civil Liberties Act) 서명식

재현되는 역사, 조선계 주민 강제이주와 일본계 미국인 강제이주

베인브리지 섬 일본계 미국인 강제 이주 기념관은 이 섬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로 배에 태워져 섬에서 떠났던 이글데일 페리 부두의 부지에, 진입로부터 부두까지 길이 276피트(1명당 1피트, 기사 안에서 서술한 276명이라는 인원 수는 베인브리지 섬 일본계 미국인 강제 이주 기념관 표기를 기준으로 했다)의 '이야기 벽' 형태로 조성되었다.

사람들은 이민·포용·추방·수용·귀환 5단계 이야기로 표현된 추모벽을 따라 걸으며 가족별 이름, 나이와 함께 배치된 사연들을 접하다 보면 당사자가 된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메리 하야시는 간호학과 학생이었습니다. 이소사보루 카타야마는 온실과 묘목장을 운영했습니다. 키미예 시바야마는 주부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토라 오타키는 교사였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페리를 탔던 사람들 중 일부이다. 그 이야기 벽의 끝은 추방 출발 데크이다.

정부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 이주조치로 갑자기 친구를 떠나보내게 된 이웃의 기억 "화가 났어요. 군인들이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부두까지 내려가려는 것도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_얼 핸슨(Earl Hanson) "친구들이 (시애틀행) 기차에 타는 것을 보기 위해 더 일찍 페리를 탔어요. 기차를 따라갈 수 없을 때까지 기차 옆을 달렸어요."_리치 바(Rich Barr)
정부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 이주조치로 갑자기 친구를 떠나보내게 된 이웃의 기억"화가 났어요. 군인들이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부두까지 내려가려는 것도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_얼 핸슨(Earl Hanson) "친구들이 (시애틀행) 기차에 타는 것을 보기 위해 더 일찍 페리를 탔어요. 기차를 따라갈 수 없을 때까지 기차 옆을 달렸어요."_리치 바(Rich Barr) ⓒ 이안수

데크의 끝에 서자 마치 삶의 낭떠러지 끝에 선 것처럼 아득했다. 아름다웠던 푸젯 사운드(Puget Sound)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바뀌고 어떤 선택도 불가능할 것 같은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이라는 소망은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감의 다른 표현으로 다가왔다. 역사는 기억이 망각되기를 기다렸다가 재현되곤 한다. 마치 막이 내린 무대 뒤에서 다시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1937년,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약 17만 명의 조선계 주민(고려인)을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로 강제 이주시켰다. 연해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일본의 '잠재적 스파이'로 의심받아 대숙청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전쟁 공포 속 소수민족 탄압의 닮은꼴이다. 조선계 주민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 후 갈대 사막에서 이탈 금지의 감시 속에서 극도의 빈곤과 생존 투쟁을 이는 동안, 미국으로 이주했던 일본계 미국인 또한 철조망 우리에 갇힌 시대를 살아야 했다.

이 기념 공간은 미국이라는 국가에 의해 미국 시민이 희생 당한 기억을 잊지 않고자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야욕에 빠진 국가와 전쟁 중 국가의 인종적 편견에 의한 오판이 어떻게 수많은 삶을 파괴하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사자의 채록된 증언이 불변의 행동 지침처럼 들린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_도널드 나카타(Donld Nakata)

새로운 방문자 센터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 입구에 세워진 세로로 긴 안내판의 사진은 앞장선 무장군인을 뒤따르는 추방자들의 모습이다. 가방 하나만을 든 행렬의 흑백사진 옆 한 문장이 그래왔던 과거를 상기시킨다.

"전쟁 중에는 법이 침묵한다."_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베인브리지섬일본계미국인강제이주기념관#진주만공격#강제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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