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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제주 읍성 오현단 부근 170여 미터 남아 있는 성벽이 거뭇하다. 변덕스런 날씨로 잠깐 스친 빗물에 더욱 거뭇해졌다.
제주 읍성오현단 부근 170여 미터 남아 있는 성벽이 거뭇하다. 변덕스런 날씨로 잠깐 스친 빗물에 더욱 거뭇해졌다. ⓒ 이영천

지난 1월 중순, 거뭇한 성벽이 이채롭다. 역시 제주다. 높은 온도의 용암이 급격히 식어 굳어진 현무암으로 쌓아서다. 현무암은 가볍다. 따라서 재료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높이보다 더 두껍게 성벽을 쌓았다. 쉬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궁여지책이다. 가공하지 않은 크고 작은 현무암을 적절하게 뒤섞고, 엇갈리기를 반복해 쌓았다.

안타깝게도 성곽은 부분만 남았다. 다섯 현인을 기리는 '오현단' 부근에 겨우 170여 미터다. 그래서 오현단은 여전히 성 안에 자리한다. 그 단을 지켜내려는 듯, 읍성을 이룬 성 돌이 꿋꿋하다. 현인의 정신을 받들 듯 작은 비석 다섯이 시립 했다. 서로 간 존중일까. 단과 성벽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다. 유배의 섬이다. 제주가 품은 정(情)으로 이어진 '괸당'의 본성이, 여기 단에도 오롯이 드러났다.

오현단 성벽의 안쪽, 옛 읍성의 성벽과 나란히 '오현단'이 머문다. 다섯 현인의 정신과 제주 특유의 '괸당'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겨울에 핀 수선화가 "역시 제주"라며 말하고 있다.
오현단성벽의 안쪽, 옛 읍성의 성벽과 나란히 '오현단'이 머문다. 다섯 현인의 정신과 제주 특유의 '괸당'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다. 겨울에 핀 수선화가 "역시 제주"라며 말하고 있다. ⓒ 이영천

관리였거나 권력에 밀려 제주에 온 다섯 현인이다. 학문 뿐 아니라, 꺼지지 않는 정신의 불씨를 남겼다. 남은 성벽과 제단이, 각기 경계와 뜻으로 제주의 과거를 붙들어 미래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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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제주목관아가 유별나다. 한양 권력은 제주를 늘 서얼처럼 취급했다. 왕명으로 파견된 목사가 한양의 왕처럼, 섬의 법을 대리했다. 한양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섬에 난리가 나 생지옥으로 변할망정, 그 불길이 육지로 번지는 것만 저어했다.

그런 차별과 멸시 속에서 제주 사람들은 침묵으로 자존을 지켜냈다. 육지로는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옛 탐라의 피가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제주목관아 건물들이 유난한 위용을 드러낸다. 육지의 그것들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

제주목관아 진해루 복원된 제주목 관아로 드는 솟을 문 '진해루'다. 높다란 돌 기단에 누각을 세워 건축적 권위를 과시했다. 육지의 여느 읍성의 건축물 보다 크고 웅장하다.
제주목관아 진해루복원된 제주목 관아로 드는 솟을 문 '진해루'다. 높다란 돌 기단에 누각을 세워 건축적 권위를 과시했다. 육지의 여느 읍성의 건축물 보다 크고 웅장하다. ⓒ 이영천

이는 한양을 의식한 과시가 아니라 스스로 변방임을 선언하는, 조용하나 옹골찬 의지다. 화려한 단청과 기단의 격식이 곧 침묵하는 제주의 언어다. 조선의 질서 아래 세워진 건축물이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도 왕조다'는 자긍심이 단단히 깔려 있다.

산지천을 끼고 동쪽으로

성벽 터 아래로 물이 흐른다. 한라산 중산간에서 발원해 돌들을 적시며 읍성을 관통해 바다로 빠져나간다. 산지천이다. 한라가 흘려보낸 젖줄이다. 성 안 백성의 우물을 채웠고, 다시 성을 축축이 적셨다. 읍성의 물길이자, 뭍으로 나갈 수 없는 섬이 바깥 세상과 잇는 유일한 숨 구멍이었다.

제주목(1872년_지방지도) 한양에서 내려다 본 시선 그대로 그려진 1872년 제주목 지방지도. 지도의 아래가 북쪽으로 한양이 제주도를 어찌 취급했는지 이 지도를 통해 그 단면을 살필 수 있다.
제주목(1872년_지방지도)한양에서 내려다 본 시선 그대로 그려진 1872년 제주목 지방지도. 지도의 아래가 북쪽으로 한양이 제주도를 어찌 취급했는지 이 지도를 통해 그 단면을 살필 수 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한양이 섬 사람들 발은 묶었다지만, 물의 길까지 막지는 못했다. 물이 닿는 곳마다, 뭍을 그리워하는 제주의 마음이 조용히 함께했다. 한때 이 물은 제주읍성 밖에서 흘렀다. 오래도록 읍성에서 비켜나 있었다. 좁던 옛 성곽의 품이 산지천을 끌어안지 못해서다.

목사 이형상(李衡祥)이 물길을 품기 위해, 1702년 성벽을 다시 쌓았다. 읍성이 넓어져 산지천을 끌어 안았다. 물은 곧 길이요, 유사시 갇히게 되면 바로 생명이었다. 따라서 성 안은 물이 풍부할수록 좋았다. 이형상은 산지천을 끌어들여, 물을 얻었다. 동시에 동쪽 높다란 구릉에서 성안이 훤히 내려다 보이던 약점까지 보완해냈다.

그의 생각이 읍성을 더 넓고 두텁게 만들었다. 물은 성 안을 적셨고, 성벽은 멀리 바깥으로 돌아나갔다. 이제 성은 단순한 방어벽이 아니었다. 섬의 생명을 보듬고 지켜내는 둥지요, 울타리가 되었다. 물이 흐르고, 바깥 시선을 막고, 섬의 자존을 다시 세워냈다.

산지천과 북수구 산지천을 가르는 둥근 다리가 '북수구'다. 왼쪽(동쪽)으로 아득하게 보이는 건축물을, 제주기상청 부근에 있었던 '공신루'로 추정한다.
산지천과 북수구산지천을 가르는 둥근 다리가 '북수구'다. 왼쪽(동쪽)으로 아득하게 보이는 건축물을, 제주기상청 부근에 있었던 '공신루'로 추정한다. ⓒ 제주특별자치도청

물과 바람이 함께 흐르며, 제주목은 그렇게 다시 재탄생했다. 산지천 물길은 북수구(北水口)를 지나 망망한 바다로 향했다. 북수구 광장이 그 흔적을 지금도 말하고 있다. 오랜 세월 산지천이 바다를 만나는 곳, 육지 사람들이 첫발을 내딛는 자리다. 관리든, 유배든, 모두가 이 포구로 내렸다. 그 어귀가 밖으로 열린 유일한 제주의 출구였다. 이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무방할 앞날을 예비하고 있었다.

관덕정 앞, 총성이 터진 날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만세운동의 기념식 함성이, 찰나에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친일 경찰의 자격지심이 뿜어낸 총구였다. 이는 식민 잔재를 극복하려던 새 나라의 염원이 아니었다. 진정 일제가 물러갔는지 되묻는 백성의 눈초리에 당긴 방아쇠였다. 불완전한 해방이자 백성을 기만하는 도발이었다.

관덕정 제주도는 물론 제주시의 상징 건축물인 관덕정. 1947년 3월 1일, 이 광장에서 발포된 총성으로 '제주4.3항쟁'이 시작되었다.
관덕정제주도는 물론 제주시의 상징 건축물인 관덕정. 1947년 3월 1일, 이 광장에서 발포된 총성으로 '제주4.3항쟁'이 시작되었다. ⓒ 이영천

그로부터 1년 뒤, 미 군정청이 무력으로 제주를 가두어 포위한다. 왕조의 재림이다. 다만, 제9연대장 김익렬이 그 포위를 풀고자 했다. 그는 명령보다 양심에 따랐다. 무력 대신 대화를 택했고, 총 대신 눈을 맞추려 했다. 1948년 4월, 남로당 무장대와 협상을 통해 "도민을 살리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그의 손발은 곧 잘리고 만다. 양심이 반역으로, 화해가 항명으로 뒤바뀌었다.

이후의 총성은 전부 미군 꼭두각시들이 쏜 것이었다. 극우 청년단이 남로당 무장대 복장으로 경찰서를 습격한다. 조작된 사건은 '반란 진압'의 명분이 되었다. 국가는 이를 계엄이라 불렀다. 그날 이후 섬 사람들은 타의로 범죄자 아닌 범죄자로 살아야 했다. 제주로 향하라는 명령을, 여수와 순천에서 군인들마저 따르지 않았다.

제주에 온 군경은 명령이나 규율이 없었다. 폭도는 그들이었다. 자의에 의한 살상이 자행된다. 마을마다 불길이 일었고, 집마다 방화가 자행됐다. 중산간 주민들 모두가 해안으로 내몰렸다. 먹을 게 없었다. 그랬으니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산으로 갔다. '소개(疏開)'라 했지만, 실상은 '소탕'이었다. 노인과 아이, 여인과 농부, 그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재판도 없이 총을 맞았고, 이름도 없이 구덩이에 묻혔다.

4.3의 아이들(1948년 5월) 한라산 중산간으로 쫒겨간 아이들. 소개를 빌미로 극악한 학살이 자행된 제주4.3항쟁은, 나라가 저지른 '제노사이드'였다.
4.3의 아이들(1948년 5월)한라산 중산간으로 쫒겨간 아이들. 소개를 빌미로 극악한 학살이 자행된 제주4.3항쟁은, 나라가 저지른 '제노사이드'였다. ⓒ 제주특별자치도청(진상보고서)

북촌이 타고, 다랑쉬굴이 무너졌다. 섯알오름이 피로 물들었다. 그것은 바로 나라가 백성을 학살한 중대 범죄였다. 이념이 가른 전쟁이 아니라, 비겁한 권력과 친일 모리배가 조작해낸 '제노사이드'였다.

관덕정 앞은 도시의 일상으로 번잡했다. 평온해 보였지만,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나라는 침묵했고, 진실은 땅속으로 묻혀 버렸다. 피의 섬은 그렇게 강요된 침묵에 고요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주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 불러야 했다. 죄는 나라가 저질렀으나, 형벌은 백성 몫이었다.

2003년 10월, 국가원수로서 비로소 공손한 첫 사죄가 이뤄진다. 그리고 2006년 4월 3일 추모식에, 대통령이 다시 제주를 찾아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사라진 성, 남은 바람

제주읍성이 사라졌다. 성곽이 사라진 자리를 바람이 채웠다. 흐르는 바람이 휑한 섬사람들 마음을 지긋이 다독인다. 빈터에 풀잎은 돋아나고, 바람이 옛 역사를 읊조린다. 옛 성곽을 돌아나가던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올 것이다.

산지천 탐라문화광장 쪽에서 바라 본 산지천의 모습. 읍성을 관통하던 젖줄로, 북쪽 바다에 이르러 산지 포구를 이룬다.
산지천탐라문화광장 쪽에서 바라 본 산지천의 모습. 읍성을 관통하던 젖줄로, 북쪽 바다에 이르러 산지 포구를 이룬다. ⓒ 이영천

제주목은 그렇게 바람이 쌓은 성벽에 의지했다. 사라져 애잔한 숨결만 남았다. 성벽이 헐린 자리에, 산지 포구의 물빛이 반짝인다. 돌 틈을 드나들던 바람이 시선을 한 곳으로 끌고 간다. 사람들은 읍성을 단순한 방어막이 아닌 수호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산지 포구 제주 읍성이 온전하던 당시로 추정되는 시기의 산지 포구. 바다를 행해 뻗은, 돌로 쌓은 짧은 접안 시설이 보인다.
산지 포구제주 읍성이 온전하던 당시로 추정되는 시기의 산지 포구. 바다를 행해 뻗은, 돌로 쌓은 짧은 접안 시설이 보인다. ⓒ 제주특별자치도청

그러나 바람은, 제국의 야욕까지 함께 실어 날랐다. 일제 군부는 입헌정치의 외피 아래 군국주의 맹아를 싹 틔우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이 바로 제주의 목구멍, 산지 포구였다. 서울의 목구멍인 제물포를 장악했듯, 산지 포구를 오로지 하려는 야욕이었다. 1926년, 제주읍성의 돌들이 마구잡이로 헐려 산지 포구의 매축에 빨려 들어갔다.

그 바닷길은 섬이 바깥으로 잇닿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야욕에 눈먼 일제는, 그 길을 거꾸로 악용했다. 자원과 물산이 빠져나가고, 병장기와 폭력이 밀려들었다. 산지 포구는 그때 이미 일제의 창구로 장악 당했다. 섬의 숨결이 가쁘게 짓눌려갔다.

제주 외항 대형 쿠르즈 선박이 정박해 있는 제주 외항의 모습. 산지 포구가 제주 외항의 시작이었다.
제주 외항대형 쿠르즈 선박이 정박해 있는 제주 외항의 모습. 산지 포구가 제주 외항의 시작이었다. ⓒ 제주특별자치도청

근대화라는 허울로 신식 항만이 되었으나, 거기엔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일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겉으로는 발전이었으나, 실상은 수탈이고 기지화였다. 그래서 지금의 변화가 눈부시다.

성벽은 사라지고, 일제도 무너졌다. 성벽이 앉았던 흔적은 그러나 남았다. 오현단 부근의 성벽 170여 미터, 그리고 복원된 제주목관아의 처마 밑에 시간이 묻어둔 기억이 새싹처럼 돋아난다. 돌은 침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 제주의 회한이 그리고 미래가 깃들어 있다.

억눌림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자존, 그것이 지금 염원으로 불어오고 있다. 제주는 여전히 바람과 돌의 나라다. 무너진 성벽을 대신한 그 바람이 지금도 제주의 얼굴로, 그리고 내일의 표정을 짓고 있다.

#관덕정#오현단#산지천#북수구#제주43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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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옛 지도로 찾아가는 우리 읍성

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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