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조한 날씨 속에 쌓인 낙엽들. 방치된 자연은 한순간에 화재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 진재중
핸드폰 화면이 짧게 진동한다.
"강풍 주의. 산불에 각별히 유의 바랍니다."
잠시 뒤 같은 문구의 메시지가 다시 뜬다. 강원도 영동지방의 겨울을 알리는 신호는 이제 눈 예보가 아니라 산불 주의 문자다. 한겨울에 반복되는 이 경고는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질수록 불안은 쌓인다. 영동지방에서는 눈다운 눈을 보기 힘든 겨울이 몇 해째 계속되고 있다. 겨울답지 않게 메마른 풍경이 이어지며, 계절의 리듬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 한때 1미터 이상 쌓이던 눈과 밤새 이어지던 제설작업은 추억이 됐다. 눈 대신 마른 바람과 재난 문자가 계절을 대신하고 있다. 기후 변화는 통계보다 먼저, 이미 생활 현장에서 체감되고 있다.
지난해 여름 가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동해안 주민들은 이제 겨울 가뭄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여름에는 물이 말랐고, 겨울에는 눈이 없다. 쉬어가야 할 겨울은 더 이상 쉼의 계절이 아니라, 또 다른 긴장의 시간으로 바뀌고 있다.
눈 대신 낙엽이 쌓인 산, 바람이 키우는 불안

▲산불이 발생할 경우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되는 바짝 마른 솔잎 ⓒ 진재중
백두대간 자락은 눈 대신 바짝 마른 낙엽만이 켜켜이 쌓여 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눈이 덮여 불씨를 막아줘야 할 산은 그대로 노출돼 있다. 여기에 양간지풍이 유독 강하게 불어오는 겨울이 겹치면서 우려는 더욱 커진다. 설악산과 대관령 자락에서 동해안으로 불어내리는 강한 바람은 메마른 숲을 훑고 지나간다. 산불 위험을 일상의 걱정으로 끌어올린다. 주민들은 하늘을 보기보다 바람의 방향을 먼저 살핀다.
고성 산불부터 강릉 산불까지 현장을 기록해온 전승운 사단법인 산불방지캠페인 이사장은 올겨울 산불 위험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것이 산불"이라며 "주민과 각 사회단체가 경각심을 갖고 예방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강원동해안의 겨울은 더 이상 쉼의 계절이 아니다.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풍경의 변화가 아니라, 재난의 순서를 앞당기는 신호가 되고 있다.
겨울 가뭄의 그림자

▲산불현장에서 산불을 진압하는 헬기 ⓒ 진재중
1월 30일 오후, 강릉 시내를 가로지르는 바람은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메마른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 인도 가장자리와 화단의 흙은 이미 바짝 말라 금이 가 있었다. 강릉을 비롯해 동해·삼척·속초·고성·양양 등 강원 동해안 6개 시군에는 이날까지 8일째 건조경보가 이어지고 있다. 겨울철임에도 눈과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면서 대기는 극도로 건조해졌다. 기상청의 경고는 문자와 안내 방송으로 반복되며, 주민들의 일상 속 불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특히 강릉은 이번 겨울 들어 쌓일 정도의 눈이 단 한 차례도 내리지 않았다. 과거 극심한 가뭄으로 재난 사태까지 선포됐던 지역이다. 그 기억은 강풍·산불 주의라는 짧은 문장과 함께 다시 떠오른다. 강릉시 구정면에 사는 한 주민은 "예전에는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여 눈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산불을 걱정해야 한다"며 계절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지난 여름 물 부족으로 파 농사를 망친 한 농부는 "겨울에 눈이 내려야 봄 농사를 준비할 수 있는데, 아직 눈 한 방울도 오지 않아 올해 농사가 걱정된다"고 호소했다.

▲작년 가뭄으로 수확하지 못한 파밭메마른 흙이 갈라진 채 바람에 먼지가 날리고, 수확 시기를 놓친 파는 그대로 밭에 남아 있다. 가뭄의 흔적이 농가의 한 해를 멈춰 세운 현장이다. ⓒ 진재중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따르면 올해 강릉의 누적 강수량은 3.7㎜에 불과하다. 지난해 1월 같은 기간의 16.5㎜와 비교하면 현저히 적다. 최근 강수는 지난 19일 기록된 0.2㎜가 마지막이었다. 비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치다. 지난해 11월과 12월 강수량 역시 각각 17.3㎜, 8.7㎜로, 2024년 같은 기간보다 크게 줄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초입부터 지금까지, 하늘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산림청은 28일 오후 동해안 지역과 정선·홍천 등에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 '경계' 단계를 발령했다. 2004년 국가위기경보 4단계 체계가 도입된 이후, 1월에 '경계' 단계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산자락은 이미 긴장 상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위로 강한 바람이 스칠 때마다, 휴대전화 속 경고 문구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겹친다. 눈으로 덮여 있어야 할 숲은 그대로 노출돼 있고, 동해안 특유의 강풍은 습기 대신 위험을 실어 나른다. 3년 전 강릉을 덮쳤던 대형 산불의 기억은 아직 아물지 않은 채, 다시 떠오르고 있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릉의 겨울은 이미 눈이 아닌 강한바람과 가뭄이 뜻하지 않은 계절을 알리고 있다. 이 반복되는 경고가 단순한 안내로 끝날지, 또 하나의 신호가 될지는 하늘이 언제 열리느냐에 달려 있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휴대전화 진동이 울린다. "건조한 날씨와 강풍으로 산불 발생 위험이 높다"는 알림이다. 이어서 "담뱃불 투기와 불법 소각을 금지하고, 화목보일러 사용 시에는 불씨 관리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경고다.

▲강릉 산불로 불에 타 잿더미가 된 펜션(2023/4/12) ⓒ 진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