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논산의 성삼문묘, 일지총.팔도로 조리돌림당하던 그의 다리 하나가 묻혔다 해서 일지총이라 한다 ⓒ 이병철
고려시대 문인·정치가 정지상의 시 '대동강'은 우리나라 중세 시가사에서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친다.
대 동 강
비 멎은 뒤 긴 방축엔
풀색이 한결 더 짙은 데
남포서 그대 떠나 보내며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대동강 흘러가는 저 물결아
어느 때에 가서 마를 소냐
떠나고 보내는 이별의 눈물
해마다 흘러가는 물결을 더하거늘.
정지상의 이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자 최자(崔滋, 1188~1260)가 시샘이 나서 몇 차례 댓구를 지었지만 내용이 신통하지 않았다. 최자는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받을 만큼 당대의 문사였다. 그래서 많은 전적을 뒤져서 정지상의 '대동강'이 두보 시에 나오는 "이별하는 눈물 멀리 금강물을 더했노라" 라는 싯구와, 이백의 시 가운데 나오는 "원컨대 아홉강의 물이 맺히고 더하여 나온 것"이라고 폄하하였다. 또 이규보의 '조강송별시'의 다음의 연과 비슷하다고 밝히었다.
배는 바야흐로 사람과 멀어지고
마음은 그를 따라 움직이노니
바다를 넘쳐 닥치는 조수와 같이
눈물이 함께 걷잡을 수 없어라.
최자의 이와 같은 비평이 나오자 고려의 문인들은 입을 모아 "그런 식으로 작품을 대한다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작품이 모방작이 되겠다"고 오히려 비판하고 나섰다.
고려시대 문사 김희제(金希齊)가 동진국의 사신을 접대하러 나갔다. 김희제는 여러 차례 외국 사절의 접대관이 되어 내외에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몽골 사신들도 꼼짝하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이런 사정을 안 동진국에서는 난다긴다하는 문무를 겸한 인물을 골라 사신으로 보내었다. 동진국 사신은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 만나자마자 시 한 수를 읊어 도전했다.
봄의 신이 이제야 따뜻한
날씨를 알리는구나.
재빨리 사신의 의도를 알아차린 김희재는 댓구를 지었다.
겨울 황제가 이미 추위를 걷어갔도다.
상대가 봄을 운자로 삼아 고려를 신하로 의도하려는 뜻을 알아 챈 김희재는, 대칭되는 겨울을 운자로 하여 황제라는 화두로 상대를 넉다운시켰다. 이후 동진국은 고려조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성삼문은 새삼 소개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육신이란 것만으로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어느 해 사신의 일원이 되어 명나라엘 갔다. 성삼문의 시재를 익히 들어 아는 연경의 글쟁이들이 모여들었다. 능력을 테스트하고 종주국의 문사로써 뽐내고자 하는 속셈도 들었을 터이다. 수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점잖게 말을 걸었다. "지금 '해오라기'를 그린 명화 한 폭을 가져오고 있는데, 그 그림에 넣을 멋진 화제(畵題)를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성삼문은 자신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의 자존이 짓밟힐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오기도 생겼다. 허나, 조선 제일의 올곧은 선비 성삼문이 아닌가. 오연히 붓을 잡았다.
눈 같은 옷
구슬 같은 발
고기 노려 갈대숲에
그 얼마를 서 있었나.
해오라기의 일반적인 표상을 하나의 그림처럼 생동감 있게 쓴 화제였다. 명나라 학자들은 놀라는 한편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 사람이 들고 온 '해오라기' 그림은 채색 그림이 아니라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였고, 여기에 '해오라기'는 온통 검은색으로만 그려져 있었다.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 지켜보던 조선 선비들도 낭패감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성삼문이 다시 붓을 잡았다.
네 모습 검은 것은
산음현을 날아 지나다
왕희지의 벼루 씻은
못 속에 빠졌음이냐.
일순간 분위기는 역전되었다.
'흰해오라기'가 왕희지의 벼루 씻은 물에 빠졌다 나왔기 때문에 검어졌다고 멋진 댓구를 달아 명나라 선비들의 무릅을 꿇게 만들었다. 이렇게 명나라 선비들도 어찌하지 못한 대학자 선비를 수양대군 일파가 사지를 찢어 죽이고 말았다. 형 집행장에서 형리들이 술에 취해 도끼를 들고 광란을 부릴 때 성삼문은 시 한 수를 남겼다.
북을 울려 목숨 끊기를 재촉하니
가을바람 쓸쓸하고 해는 기울었구나
저승가는 길가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밤은 뉘집에서 자고갈거나.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