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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미있게 본 프로그램 두 개가 있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와 예능 <극한 84>다. 두 프로그램에 다 매력적인 주인공이 나온다. 바로 주호진(김선호 분)과 기안84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보면서 김선호의 멋진 역할과 목소리에 빠져 계속 다음 화를 클릭했다. 김선호가 나를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감정이 자꾸 넘실댔다. <극한 84>의 기안84를 보면서는 그의 솔직함에 감탄했다.
신입회원인 츠키가 자신보다 빨리 달릴까 봐 불안해 하는 모습, 유혹을 이기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모습, 나는 재능이 없는 건가, 하고 실망하는 모습은 꼭 내 모습 같다. 김선호에게는 선망하는 마음이, 기안84에게는 공감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정신 차리게 하는 사람들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중에서 한 장면. ⓒ 넷플릭스
드라마는 책으로 말하면 소설이고, 관찰 예능은 에세이다. 드라마나 소설은 잘 구성된 메시지가 있는 지어낸 이야기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차무희(고윤정 분)와 주호진(김선호 분)이 사귀게 될지 말지는 촬영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다. 김선호 배우가 연기한 '주호진'은 잘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러니, 정신 차리자.
그에 반해 에세이나 관찰 예능은 사실을 전제로 한다. 더 솔직할수록 매력적이다. 그런 면에서 기안84처럼 매력적인 관찰 예능 인물이 있을까 싶다. 소재나 편집도 중요하지만 등장인물의 솔직함이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극한 84>에서 기안84가 마라톤을 완주할지 못 할지 촬영을 끝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이 프로그램의 한 화를 다 보고 나면 언제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 정신 차리자.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본 후 하는 '정신 차리자'는 할 일을 미루면서까지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나에게 하는 셀프 훈계다. '김선호가 너 알아? 새해 계획 잊었어? 마감이 코앞인데 이럴래?' 하며 판타지로부터 내 현실을 지키려 애쓴다.
<극한 84>를 본 후 하는 '정신 차리자'는 기안84의 도전하는 태도와 성실함을 내 현실에 끌어들이기 위한 말이다. 프로그램을 보며 느낀 점이 그냥 산화되지 않도록, 내 삶에 스며들길 바라며 일정을 밀고 당겨 정신 차릴 틈을 만든다.

▲눈 내린지 이틀 뒤 한강 러닝 코스계속 영하권의 날씨지만, 해가 있는 동안에는 뛸만하다. ⓒ 김지은
달리기를 위해 일찍 알람을 맞춘다. 알람에 맞춰 눈을 뜬다. 누워서 눈만 깜박깜박한다. 잠시만 머뭇대면 그 사이를 다른 생각이 잽싸게 비집고 들어온다. 나가지 말까? 오늘따라 피곤하다. 고개를 돌리니 어젯밤 챙겨놨던 러닝복이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반대로 돌린다. 잠시 더 웅크리고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자책한다. 나는 러닝을 좋아한다면서 왜 이러지.
바람 부는 한강을 살살 뛰며 생각했다. 세상에 순도 100%의 좋아함이 있을까. 하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달릴 때의 상쾌함과 뿌듯함, 그만 뛰고 싶지만 조금만 더 뛰자, 하며 자신을 달래며 조금 나아가 보는 것, 이것까지가 좋아함에 포함되는 게 아닐까.
내게 주어진 마라톤 완주하기
<극한 84>를 보면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온다. '걸을까, 그만 뛸까, 포기할까' 하고 망설이는 모습. '이젠 못 뛰겠다' 하고 주저앉는 모습. 다리에 쥐가 나도 이를 악물고 뛰는 모습. 너무 힘들 때 기안84는 '뒤진다, 뒤져'라고 했는데, 그 표현이 얼마나 입에 착 붙던지. 그곳을 뛰어보지 않은 나도 공감이 됐다. 뙤약볕 아래서 누웠으면 누웠지, 체기가 올라와 토하면 토했지, 포기하지 않는다.
<극한 84>라는 프로그램명답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빅5 마라톤이나 북극 마라톤은 극한이다. 그러나 와인이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에서 개최되는 메독 마라톤은 마라톤 초기 영상까지 왜 극한인지 궁금했다. 극한과는 반대인 술과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축제 같은 마라톤이기 때문이다.
코스 구간마다 와인 시음, 음식 시식, 음악 공연 등이 마련되어 있다. 기안84는 달리는 동안 "이게 무슨 마라톤이냐"라고 여러 번 말했다. 마라톤 코스가 중반 이후로 가자, 축제처럼 웃으며 신나게 즐기던 참가자들의 표정이 점점 변한다. 기안84는 여러 와인 시음대를 지나고 유혹을 뿌리치며 이 마라톤이 왜 극한인지 알겠다고 한다.

▲<극한84> 북극 마라톤 중에 얼음 먹는 기안84. ⓒ MBC
어떤 사람의 인생은 '아프리카 빅5' 마라톤 같기도, 또 어떤 사람의 인생은 메독 마라톤 같기도 혹은 북극 마라톤 같기도 할 거다. 겉에선 너무 힘든 인생 같아도 그 안을 보면 여러 기쁨의 순간들이 있고, 겉에선 너무 축제 같은 인생도 속을 보면, 힘든 계곡들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도 쉽게 판단할 수 없고, 나는 그냥 나에게 주어진 마라톤을 잘 완주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도.
<극한 84>를 보며 느낀 건 순도 100%의 즐거움과 좋음은 없다는 거다. 연달아 기쁨만 이어지는 삶의 기쁨보다 고통과 시련 뒤의 기쁨이 훨씬 더 농도가 진하지 않을까. 기안이 메독 마라톤 41km 부근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천상의 맛이라 말한 것처럼. 북극 마라톤에서 얼음을 씹어 먹으며 생존의 맛을 경험했던 것처럼.
주호진의 그윽한 눈빛에 빠져 그 옆에 앉아 있던 나를 기안84가 현실로 옮겨 놓았다. 오늘도 알람을 끄고 다시 자리에 누웠고 비록 아침에는 뛰지 못했지만, 할 일을 마치고 늦은 오후에 짬을 내어 뛰었다. 더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위해서.

▲저녁 노을질 때 한강 러닝오후 5시쯤 러닝을 시작해 한 시간 쯤 달리면 노을이 지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오후에 나왔지만, 오히려 좋았던 날. ⓒ 김지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