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 전후는 24절기로 '대한(大寒)'으로 해마다 1년 중 가장 추운 때다. 요즘은 지자체에서 친절하게도 이맘때면 '안전 문자' -곧, 기온이 몹시 낮으니까 노약자는 가능한 외출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곤 한다. 지난달 친구를 만나려 외출하다가 뜻밖에 교통사고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집에서 가료 중인 나는 겨우내 집안에서만 맴도는 중이다. 목욕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온몸이 끈적끈적 찌뿌둥하다.
'그래, 떠나자.' 여행 진짜 묘미는 '겨울 나그네'일 것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이 겨울 따끈한 온천 탕에 온몸을 담근다면 기분도, 몸도 상쾌해지리라는 생각과 함께 평소 자주 가던 경북 '풍기 온천'이 떠올랐다. 점심을 어쩌지 하다가 그곳 풍기 역전의 청국장 집, 아니면 풍기 면옥의 갈비탕이나 홍삼 칼국수를 들기로 하고, 목욕 가방을 챙긴 후 곧장 원주 역으로 향했다. 거기로 가는 도중, 휴대폰으로 오후 1시에 출발하는 열차 표를 예매했다.
객차 내에서 썰렁한 겨울 경치를 바라보면서 군것질 요기를 하는 것도 제격일 것 같아 보리차와 빵 한 봉지도 샀다. 13: 19에 출발하는 ITX-마음 열차는 제 시간에 출발했다. 평일인 데다가 추운 날씨 탓인지 객차 내 승객은 절반 정도였다.
내 좌석 옆 좌석이 비었기에 가방을 옆자리에 놓고 앞 의자에 붙은 탁자를 펴고 보리차 병과 빵 봉지, 그리고 준비해간 책을 꺼내 놓고 약간 출출한 배고픔을 달랬다. 나는 역마 기를 타고난 탓인지 열차를 타고 차창 밖을 보면 기분이 몹시 상쾌해 지고 이런저런 영감이 잘 떠올랐다. 그래서 글이 잘 쓰여지지 않을 때는 열차 여행을 한다.

▲청국장청국장 백반 상차림 ⓒ 박도
작가는 쓰는 기쁨에 글을 쓴다
사실 나는 이 겨울 아주 독한 마음을 먹고 언젠가 죽기 전에 꼭 쓰고 싶었던 고향 선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진면목을 그린 산문집 <박정희를 스케치하다>(가제)를 막 탈고했다. 이 작품은 본격적인 소설 <인간 박정희의 삶과 죽음, 또는 '토사구팽'>(가제)을 쓰기 전의 작품으로,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이야기로 들은 걸 모아 한 권의 산문집으로 썼다. 아직 출판 여부는 미정이나 일단 탈고했다는 데 어떤 뿌듯함이 있다. 사실 작가는 이 기쁨 때문에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평소 알고 지내는 정희성 시인은 발표하지 않은 시 세 편을 지니고 있으면 부자 부럽지 않다고 했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지난날 같으면 이미 선인세를 받고 출판사로 넘겼을 원고를 나는 기필한 지 석 달을 넘겼는데도 여태 끼고 있다.
언제 출판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탈고했으니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자, 한 전직 언론인은 내 생전에 발표치 못하면 사후에라도 당신이 대신 출판해 주겠다고 언약을 하니 고맙지 아니한가.
차창 밖 썰렁한 겨울 경치를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하는 새, 열차는 풍기 역에 닿았다. 풍기 역을 나서면서 청국장 집과 풍기면옥 두 단골 집 가운데 어느 곳을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왠지 역에서 가까운 청국장 집 냄새가 나를 부쩍 유혹, 그 집 문을 열게 했다.
그 집은 늘 손님으로 만원이라 대기자 명부에 이름을 쓰고 밖에서 기다렸는데 이날은 추운 날씨 탓인지 빈자리가 많았다. 잠시 후 주문한 청국장 백반이 나왔다. 내가 10차례 정도 이 집 청국장 백반을 들었다. 늘 깔끔한 상차림과 그윽한 청국장 맛에 매번 감탄사를 연발하기 마련이다.
중소 도시 역전 청국장 집인 데도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까닭을 알 만하다.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는데도 청국장 뚝배기에는 찌개가 반 이상 남아 있었다. 내가 남기면 10중 8, 9는 곧장 쓰레기통으로 갈 것이다. 점원에게 그런 얘기를 하자 그는 남은 걸 포장해 주겠단다. 내 평생 장 맛이 좋다고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기는 처음이다.
경북 '풍기'하면 '인삼'을 연상케 하는 건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바다. 그래서 나는 풍기에 갈 때마다 인삼을 사다가 구룡사 들머리 내 단골 밥집에 무료 심부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장사가 잘 안 된다고 하기에 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풍기 지방의 또 하나 특산물은 소백산 꿀이다. 마침 내 집 주방에 꿀이 떨어졌기에 손님보다 상인이 더 많은 인삼 가게에 들렸다. 그러자 오랜 단골을 알아보는 사장님의 표정과 말씨가 춘향모 월매가 이몽룡 도령 대하듯 한다.

▲풍기 온천소백산 풍기 온천장 ⓒ 박도
지상 극락이 여긴가 하노라
그곳을 나온 뒤 곧장 풍기 온천 행 25번 버스에 오르자 곧 소백산 밑 온천장에 내려준다. 샤워를 한 뒤 온천탕에 몸을 담그자 '지상 극락이 여긴가 하노라'다. 이곳 노천 온천탕의 일품은 노천탕에 비스듬히 누워 멀리 소백산 정상을 지긋이 바라보는 건데, 혹한기 탓인지 노천탕은 폐쇄됐다.
대신 온탕, 열탕, 건식 사우나, 습식 사우나 실을 번갈아 가며 즐긴 뒤, 버스정류장으로 나오자 죽령 산마루에서 내려온 버스가 나그네를 반겨 맞았다. 풍기 역에서 열차에 승차하여 제천 역에서 환승, 집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조금 넘었다. 마침 전기밥솥에 밥 한 공기가 남아 있기에 청국장 싸온 걸 데워 먹으니 꿀맛이다.
잠들기 전, 이날 쓴 돈을 계산해 보다. 열차 왕복 8800(경로 우대)원, 시내버스 4회 8000원, 청국장 1만6000원, 목욕비 9000 원, 꿀 한 통 2만5000원 모두 66800원이다. 이 가운데 꿀 값을 제외하자 겨울 나그네 여행비는 총 4만1800원이다. 이만하면 겨울 나그네 작가의 행복한 하루가 아닌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도 페북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