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찬 총리가 15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총리직무대행을 맡을 한덕수 경제부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여기 한 명의 전직 국무총리가 있다. 1952년 여름, 충청남도 청양 7남매 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2년 10월 어느 날, 휴교령이 떨어지자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그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학교가 문을 닫았냐? 학생들은 다 집에 갔느냐?' 그는 '예, 유신이라서 닫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이건 그냥 독재다'라고 정색하며 한참 말을 쏟아냈다. 먼 훗날, 그는 "그 말씀이 '너 왜 집에 왔느냐' 그렇게 들렸어요"라고 회고했다.
또 한 명의 전직 국무총리가 있다. 1949년 여름, 전라북도 전주 출신인 그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공직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청와대 통상산업비서관과 통상산업부 차관을, 김대중 정부에서는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았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국무조정실장과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을 거쳐 마지막 총리를 지냈다. 2022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 한 번 하기도 어렵다는 총리를 또 맡았다.
두 사람, 이해찬과 한덕수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함께 일했다. 당시 책임총리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던 이해찬은 2005년 3월, 한덕수를 직접 경제부총리로 발탁했다. 당시 대통령이 부총리 인선을 협의하기 위해 연락하자 이해찬은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을 쓰는 게 좋겠다"며 추천했고, 다음날 문서로 공식 제청했다. 이해찬은 평소 사석에서도 '꼼꼼하게 일 처리를 잘하고, 다양한 경험을 갖추고 있다'며 한덕수를 호평했다고 한다.
너무 다른 두 사람... 누명 벗은 이해찬, 책임 모면 못한 한덕수
하지만 인생의 경로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의 불호령은 이해찬을 '운동권'으로 만들었다. 서울로 올라온 뒤 그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몸담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는 주모자급으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11개월 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서울대 앞에서 '광장서적'을 운영하며 재야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1979년 11월 말, 경찰이 찾아왔다. 곧장 서빙고행이었다. 보안사에 끌려간 그는 12월 8일 석방됐지만, 이듬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엮이게 된다.
<이해찬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1980년 9월 12일 1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항변했다.
"이 재판이 과연 정당한 재판이냐? 이 군사법정이 혁명 재판부인지 쿠데타 재판부인지를 분명히 밝혀라. 만일 이 재판이 혁명 재판부라면 혁명의 대의명분은 무엇이냐? 수천 명의 광주 시민을 살상하고 전국에서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을 구속한 혁명의 명분이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라. 명분이 없는 혁명은 없다. 그것은 바로 권력을 뺏는 쿠데타다. (중략) 나는 이 목숨을 다 바쳐 이 땅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워 나가겠다. 전두환 일당인 당신들을 붙잡아 이 법정에 세우겠다. 나는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2003년 1월 22일 서울고등법원은 이해찬 등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던 18명의 재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내란범'이라는 누명을 벗은 이해찬은 이듬해 6월 30일 제36대 총리로 취임한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광주민주유공자증. 이 대표는 5.18민주화운동을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작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대학 재학 시절 고문과 옥고를 치른 바 있다. 2019. 2. 15 ⓒ 이해찬 당대표실 홈페이지 갈무리
20여 년 뒤, 한덕수가 피고인석에 섰다. 지난해 11월 26일 그는 "가장 정직한 마지막 고백"이라며 내란중요임무종사자 혐의에 대한 최후진술을 마무리했다.
"그날 밤의 혼란한 기억을 복기하면 복기할수록 제가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절망감이 사무칠 따름이다. 저는 그 괴로움을 죽는 날까지 지고 가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동안 저를 믿어주신 국민들 앞에, 저의 모든 어려운 순간을 함께 해주신 가족과 지인과 동료 공직자분들 앞에 가슴이 아프고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기 어렵다. 다만 비록 비상계엄을 막지 못했지만 비상계엄에 찬성하거나 비상계엄을 도우려 한 일은 결단코 없다. 그것이 오늘 이 역사적인 법정에서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마지막 고백이다."
'정직한 고백'이랬지만... "진정성 인정 어렵다" 꾸짖은 법원
법원은 동의하지 않았다. 2026년 1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3부(재판장 이진관 부장판사)는 여러 차례 "믿지 않는다"는 표현을 써가며 한덕수의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판단했다. 또한 내란특검(특별검사 조은석) 양형 의견보다 8년이나 무거운 징역 23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12.3 비상계엄=내란'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던 옛 국정 2인자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회주의를 꾸짖었다.
"피고인은 간접적으로나마 민주적 정당성과 그에 합당한 책임을 부여받은 국무총리로서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헌법을 수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헌법적 의무를 부담한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12.3 내란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러한 의무와 책임을 끝내 외면하고, 오히려 그 일원으로서 가담하기로 선택하였다. 이러한 피고인의 행위로 인해 대한민국은 자칫하면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유린당했던 어두운 과거로 회귀하여 독재정치라는 수렁에서 장기간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수 있었고, 국민은 씻을 수 없는 상실감과 상처를 입게 되었다.
피고인은 국무총리로서 12.3 내란의 진실을 밝히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사후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이 사건 비상계엄 관련 문건을 은닉하고, 비상계엄 선포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허위공문서를 작성하였다가 폐기하였으며, 헌법재판소에서 위증하였다.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도 허위로 진술을 번복하고 대통령실 CCTV 영상과 같은 객관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등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할 뿐이다. 피고인이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한 행위들로 인해 우리 사회의 정치적 분열과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고, 앞으로도 이러한 상처와 갈등이 쉽사리 봉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피고인은 제2회 공판기일에서 12.3 내란에 관하여 '여러 가지 법적인 검토가 필요하여 공개적으로 제지하지 못했다'는 취지로만 진술하였다가, 이 법원의 요구에 따라 내란중요임무종사 공소사실이 택일적으로 추가되고 대통령실 CCTV 영상 재생 및 증인신문 등 증거조사를 거쳐 자신의 범죄사실이 탄로나 형사처벌 기로에 서자 마지못해 최후진술에 이르러서야 '국민이 겪은 고통과 혼란에 대해 가슴 깊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취지로 진술하였는 바, 그 사과의 진정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달리 피고인이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거나, 자신의 범죄 행위로 인하여 국가와 국민이 입은 피해를 회복시키기 위한 어떠한 노력을 하였다고 볼 아무런 자료가 없다."
한덕수는 이날 법정구속됐다. 50년 공직생활 내내 화려한 기록을 세워나갔지만, 정작 가장 무거운 책임은 외면했던 그는 어쩌면 역대 총리 가운데 최초로 '내란범'으로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한덕수 1심 선고공판, "국민에게 할 말 없느냐” 질문에 묵묵부답...내란 가담 및 방조 혐의를 받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