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의 은퇴이몽’은 퇴직 4년차로서 은퇴 전후의 현실을 기록합니다. 숫자만이 아니라 몸, 관계, 생활기술, 돌봄, 역할의 전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 봅니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말해야 할까."
퇴직 준비 10년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붙잡았던 인생 후반의 질문이다. 먼저 퇴직한 인생 선배들의 흔적을 살피는 과정에서, 이 질문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다가왔다.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부장도 상무도 아닌 평범한 동네 아저씨가 된다. 그 변화 앞에서 많은 선배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퇴직 전의 위치를 조금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을 보인다.
퇴직 관련 교육 프로그램에 들어설 때마다 그런 장면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특히 자기소개 시간이 되면 그 마음이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저는 ○○회사 기획팀에서 상무로 있었던 김○○입니다."
이름이 흔들리는 퇴직
회사 규모나 직무를 떠나, 현역자도 퇴직자도 회사명·부서·직급이 자기소개 첫 줄을 차지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특히 퇴직자의 경우엔 지금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를 붙잡고 있는 듯한 장면이 더 또렷해 보인다. 직함이 붙어 있던 시절엔 당연했던 존중과 주목이 퇴직과 함께 얇아진다는 걸,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 체감된다. 말이 줄어들고, 전화가 줄어들고, 누군가의 일정표에서 이름이 빠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고 나서야 깨닫는다. 퇴직이 현실이 되는 순간, 돈보다 먼저 '이름'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퇴직 이후엔 '누구였는지'보다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사람을 설명한다. ⓒ giorgiotrovato on Unsplash
회사에 있을 땐 소개가 짧았다. 어느 회사, 어느 부서, 어떤 직책. 말이 끝나기 전에 상대는 이미 감을 잡는다. 회사 이름이 나를 대신 설명해주니 편했다. 하지만 퇴직하고 나면 "그래서 지금은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당분간은 쉬겠다"는 말이 가장 쉽지만, 가장 어렵기도 하다. 쉬는 게 나빠서가 아니라, "요즘 뭐하세요?"란 질문에 답할 말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퇴직 이후엔 '누구였는지'보다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사람을 설명한다. 나는 '누군가가 붙여주는 이름표'를 달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인생 후반부, '글쓰며 여행하는 산업강사의 삶'으로 이어졌다. 스스로 부를 이름이 없으면, 결국 남이 붙여준 낯선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퇴직 후 나를 누구라고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막막한 철학으로 남겨두지 않고, 일상에서 꺼내 쓸 문장으로 바꿔두고 싶었다. 문제는 퇴직 이후엔 이 소개를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때 가장 먼저 꺼내는 것이 명함이다.
나를 설명하는 명함
처음엔 명함을 내미는 순간, 잠깐씩 멈칫하곤 했다. 예전처럼 회사 이름이 먼저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공백은 짧지만 이상하게도 길게 느껴진다. 이제는 내 이름이 전부다. 소개는 금방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보여줘야 한다.
그때 명함은 정보가 아니라 '기준'을 꺼내 보이는 도구가 된다. 예전엔 직함이 신뢰를 대신해줬지만, 이제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이건 비단 나처럼 강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한 사람도, 다시 구직을 하는 사람도 결국 '자기 이름으로' 설명해야 한다.

▲명함 후면일(강의)에 임하는 나의 핵심가치 5 ⓒ 이종범
나는 그 기준을 5가지로 압축해 명함 뒷면에 적어두었다. 이는 섭외한 분에게 드리는 약속이기도 하고, 강단에 서기 전 스스로에게 거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 다섯 줄은 잘 보이려고 쓰는 문장이 아니다. 적어놓고 지키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보여주기식'이 된다. 그 문장은 결국 나를 붙잡는다. 가끔은 족쇄처럼 느껴져도, 그 불편함이 내 자세를 다시 바로잡아 준다. '오늘의 나'를 '어제의 직함'으로 대신하지 않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묻는다.
"굳이 명함을… 이렇게까지 꾸밀 필요가 있나요?"
이제는 이렇게 답한다. 회사가 소개해주지 않는 시대에, 이름을 지키는 방법은 결국 스스로 세운 기준을 반복해서 증명하는 일이라고. 퇴직 이후에 남는 건 직함이 아니라 태도라고. 퇴직 후 내 이름값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매일 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