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旺山) 허위(許蔿)는 1855년 4월 2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현, 경북 구미시)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문장이 비범했다. 일곱 살 때 지은 글이다.
"달이 대장군 되니, 별이 많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
"꽃을 꺾으니 봄이 손에 있고, 물 길으니 달이 집에 들어온다(折花春在手, 汲水月入家)."
집안 어른들이 그의 글 재주에 놀라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이를 평정하자 우매한 사람들은 비적을 소탕하였다고 좋아하였다. 하지만 왕산은 탄식하며 "일본 군대가 이를 기화로 우리나라를 쳐 없애는 화를 입을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흉악한 일본의 본심을 그때부터 꿰뚫었다.
을미(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왕산은 그 이듬해 3월,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고 하는 수 없이 해산시켰다. 이후 분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세상을 등지며 살고자 맏형 방산이 사는 진보로 가서 학문을 닦으며 세상의 이치를 더욱 깨쳤다. 그 무렵 왕산의 인물을 알아본 대신 신기선이 고종황제에게 천거, 알현케 하자 초고속 승진을 거듭, 이듬해 5월에는 평리원 수반판서(대법관)를 제수 받았다.

▲왕상 허위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 왕산기념사업회
고종황제의 '의대조'
을사(1905)년 3월 1일, 왕산은 고종황제의 신임으로 비서원승(秘書院丞, 현 대법원장)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정무를 모두 관장하면서 제 멋대로 권세를 부렸다. 이에 충성되고 의기 있는 신하는 모두 벼슬을 그만두었다. 왕산도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 생활 중, 을사 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 충청, 전라, 강원 등 전국 각도를 두루 돌면서 장차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를 꾀하였다.
정미(1907년) 7월, 밀사가 대궐에서 내린 봉서(封書) 한 통을 전하여 펼쳐보니 '의거(義擧)'라는 두 글자인데 이는 고종황제의 '의대조(衣帶詔: 임금이 옷에다가 써 내린 왕명)'이었다. 그해 9월, 경기도에서 창의하여 포천, 연천, 적성, 삭령, 철원, 양주 등 여러 곳에 군사를 배치하는 한편, 강화로 내려가며 부하 권중설, 김규식, 연기우 등이 적진을 여러 번 격파해서 군세를 크게 떨쳤다.
그해 겨울에 국내 각 지역의 지사에게 연락하자 모두 양주에 모였는데 그때 군사가 일만 명이었다.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삼고 왕산은 군사장이 되었다. 관동(關東) 민긍호, 호서(湖西) 이강년, 교남(嶠南, 영남) 박정빈, 진동(鎭東, 경기 황해) 권중희, 관서(關西) 방인관, 관북(關北) 정봉준 등이었다. 각도마다 대장 임명을 마친 뒤 사기충천 서울로 진군케 했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에 있는 일제 통감부를 쳐부수고, 조약을 파기한 다음, 각국 영사관을 두루 방문하여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처지를 자세히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신(1908년) 1월 27일,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와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의병장이 진두지휘하는 13도 창의군 선봉대는 군사 300여 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으로 진군할 차비를 차렸다. 선봉대가 동대문밖 30리 지점에 이르러, 일군이 나타나면 일격을 가할 계획으로 기다렸다.
애초에는 민긍호의 관동 의병 2천, 허위의 진동의병 2천, 이강년의 호서의병 1천, 신돌석의 교남의병 8백 명, 등 후원부대가 오기로 했다. 하지만 제 시간에 당도치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일군이 갑자기 총공세를 펴왔다. 한참동안 일군과 맹렬하게 싸웠으나 일군의 최신 무기를 의병들의 구식무기로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어 퇴각하였다. 게다가 총대장 이인영은 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귀향하였기에 왕산이 총대장 중책을 맡았다.

▲13도 창의군 기념탑서울 망우 역사공원에 세워진 13도 창의군 기념탑 ⓒ 박도
왕산은 연천으로 퇴각한 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냈다. 후일 다시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을 꾀하던 중, 그해 6월 11일 은신 중이던 양평에서 왕산이 일본헌병대에 기습 체포됨으로써 끝내 실현치 못하였다. 그날로 왕산은 서울로 압송됐다.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 소장이 직접 심문을 하자, 왕산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멈추려 하듯'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라 항변했다.

▲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 소장 ⓒ 눈빛출판사 <대한국인 안중근>
아카시는 문답을 할수록 왕산의 인품과 충성심에 감복하여 왕산을 국사(國士,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로 대우했다. 이토히로부미 통감에게 왕산의 목숨만은 살려 주기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그해(1908) 10월 21일 오전 10시, 왕산은 서대문 감옥의 교수대에 올랐다. 제자 박상진(朴尙鎭)이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영 아래 모셨다. 왕산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혼은 죽지 않고 마치 민들레의 꽃씨처럼 바람에 흩날려서 삼천리 방방곡곡뿐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하와이 등 전 세계로 흩날려서 조국 해방의 불씨가 되었다. 후일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왕산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왕산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대한민국장왕산 허위 군시장에게 내린 대한민국장 ⓒ 왕산기념사업회
* 이 글은 기자의 현장 답사와 더불어 한국학문헌연구소편 <왕산전집>과 선주문화연구총서3 <왕산허위의 사상과 구국의병항쟁> 등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025년 <민족화해> 겨울 호에도 이미 실렸고, 박도 페북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