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사님께서 조상의 행적과 순국 과정에 대한 유족들의 애타는 의문을 풀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제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 조부님이신 김상윤(金相潤) 의사의 순국 과정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순국의 길을 걸으셨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저희 유족들은 조부님이 돌아가신 연도를 1927년 10월 19일로 알고 제사를 모셔왔습니다."
이는 의열단에서 활약한 김상윤 의사의 손자 김기봉 선생(80)의 이야기다. 팔순의 김기봉 선생은 지난 19일 연구소를 찾아 글쓴이가 그동안 찾은 자료의 설명을 듣고, 가슴속 한을 다시 한번 쏟아냈다.
75일 전, 놀라운 발견
요즘 부쩍 김기봉 선생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다고 했다. '요즘 부쩍'이라고 했지만, 이 이야기의 시작은 75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까지 김상윤 의사의 순국일은 1927년으로 고정돼 있었고, 유족들은 이날을 순국일로 알고 제사를 모셔 왔다.

▲김상윤의열단원 김상윤 의사 ⓒ 국가보훈부
75일 전인 2025년 11월 3일 월요일 낮 12시 30분, 그날은 독립포럼(대표 최용규, 국립인천대 전 이사장) 모임이 있는 날로, 10여 명의 회원이 여의도 모 음식점에 모였다. 글쓴이도 회원으로 참석했다.
이날 김기봉 선생은 음식점에 들어서자마자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조부인 김상윤 의사의 기록으로 보이는 소화 10년(1935) 자료를 입수했다며, 흥분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자료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달랑 2장짜리'에 불과했다. '이 정도 근거로 어떻게 원본을 찾을 것인가!' 고민이 깊어졌다. 말하자면 밑도 끝도 없는 '수사'가 시작된 셈이었다.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격이었지만, 과거 이러한 자료의 출처를 찾은 경험을 되살려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그 결과, 이 책의 원본이 일본에서 출간한 <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政勢視察報告集)>(전권 1~9권)임을 알아냈다. 일본인 친구 도다 이쿠코(戶田郁子)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상정세시찰보고집김상윤 의사의 1935넌~1937년 기록이 들어 있는 <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政勢視察報告集)>(전권 1~9권), 고려도서무역(1976) 영인본 ⓒ 고려도서무역
일본제국주의는 본토 검사들을 중국으로 파견해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와 요시찰 인물들을 정탐했고, 이를 꼼꼼히 기록했다. 이 자료들은 소화 10년(1935) 일본 사법성형사국(司法省刑事局)에서 극비문서로 제본됐다. 이후 교토대 와타나베 도오루(渡部徹, 1918~1995) 교수가 <사상정세시찰보고집>으로 일본동양문화사(1976)에서 출간했고, 고려도서무역이 1976년 국내 판본으로 다시 발간했다.
글쓴이가 입수한 책은 고려도서무역 판본이었다. 전권 1~9권을 검토한 결과, 1935~1937년 자료에서 김상윤 의사가 '요시찰 수배자'로 일본 당국에 의해 수배 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에 등장하는 김상윤의 이명과 의열단원이라는 신분을 종합하면, 해당 기록 속 김상윤은 의사 본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자료를 통해 김상윤 의사가 적어도 소화 10~12년(1935~1937)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27년에 돌아가신 줄 알고 제사를 모시던 유족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상정세시찰보고집>에 기록된 김상윤 의사 ⓒ 사상

▲김상윤 의사 기록<사상정세시찰보고집(思想政勢視察報告集)>(전권 1-9권)을 검토하여 찾아낸 김상윤 의사 기록을 글쓴이가 정리함. (국가보훈부에서는 김상윤 의사의 죽음을 1927년으로 기록해 두고 있다.) ⓒ 이윤옥
여전히 잊힌 독립운동가
의열단원 김상윤 의사(호: 초산(楚山). 이명: 김옥, 김억, 김옥산, 김차근, 김진정, 김시중, 김상화)는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 등과 의열단을 창단하고,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4인 참모부'의 일원으로 단체의 조직 체계와 모든 거사를 기획·지휘했다.
창단 직후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 밀양경찰서 등 주요 일제기관에 대한 총공격 거사를 계획하고, 1920년 3월 황상규, 윤세주와 함께 국내로 잡입해 폭탄을 투척하는 등 항일 투쟁을 펼쳤다. 이후 중국으로 탈출해 1924년 상해 청년동맹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1925년까지 의열단 간부로 활동했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김상윤 의사는 당시 김구 선생과 함께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 10인에 속하는 요시찰 인물로, 조선 총독부 경무국에서 하루라도 빨리 잡아들이지 못해 안달이 난 핵심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상윤 의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20년 11월 10일, 의열의 고장 경남 밀양에서는 '밀양경찰서 폭탄의거 100주년 학술회의'가 열렸다. 글쓴이도 이 회의에 참석해 김상윤 의사의 투철한 독립활동을 취재한 바 있다(관련 기사:
"독립운동가 유해 송환,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https://omn.kr/1qf20).
그날 학술회의장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조부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김기봉 선생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조부님 관련 의열단 관련 학술회의를 지켜보면서 회의 내내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조부님이 의열단 간부 4명에 속했으면서도 공적이 저평가되고, 서훈조차 다른 의열단원에 견주어 가장 낮은 등급인 애족장에 그치고 있는 것도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부님의 죽음과 그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불령선인 명단상해총영사관에서 외무대신앞으로 보낸 상해 행동파 10명의 불령선인 명단 속 김상윤 의사 등 10명의 이름이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김기봉 선생은 조부가 '31살에 중국 상해에서 사망하고, 복건성에 묘비가 있다'는 국가보훈부의 기록을 믿고,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지만 모두 허사였다고 전했다. 평생소원은 조부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의문을 푸는 일이며, 이 소원이 풀려 조부님의 유해를 고국에 모시고 올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강조했다.
남은 숙제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김상윤 의사의 죽음과 관련된 정보는 오리무중이다. 다만 1935년~1937년 자료에서 김상윤 의사의 생존 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유족에게 큰 의미다.
유감스러운 것은 어느 기관도 김상윤 의사의 정확한 순국일을 확인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장 공신력이 있는 국가보훈부조차 순국일을 1927년으로 기정화하고 있을 뿐이다. 풍부한 자료를 보유한 국가보훈부가 '김상윤 1927년 사망'에 의문을 품은 유족의 질문에 시원스러운 답을 해주고 있지 않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고 김기봉 선생은 말했다.

▲김기봉 선생과 독립포럼 회원들국립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에 찾아와 조부 김상윤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김기봉 선생(왼쪽에서 4번째)과 독립포럼 회원들. ⓒ 이윤옥
여기서 남은 숙제는 글쓴이가 밝혀낸 1935~1937년 기록 외의 자료다. 쟁점은 1927년 사망설 이후의 모든 기록과 사망일에 대한 최종 기록을 찾아내는 일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자료는 1925년까지로 제한돼 있다.
1927년 사망설을 믿고 제사를 모셔온 유족들은 이번에 확인된 1935년 이후 기록으로 할아버지 김상윤 의사의 생존 가능성을 알게 되면서 궁금증이 더욱 커지고 있다. 국가보훈부와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관계 기관이 김상윤 의사의 순국일과 순국 장소를 정확히 밝혀 자료를 공개해주길 기대하며, 글쓴이도 후속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우리문화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