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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겨울 주말, 남편과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은 남편이 밖에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면서 나갔다. 잠시 후 들어 온 남편 손에는 플라스틱 통이 들려 있었다. 대뜸 내게 주더니 "고추장이래" 한다.
"고추장? 웬 고추장?"
"음 우리 노인정 회원이 회장님네는 다른 건 다 집에서 만들어 먹겠지만 고추장은 안 담가 먹을 것 같아서 맛보시라고 가지고 왔어요 하면서 주던데."
아주 오랜만에 받아보는 귀한 선물이다.

▲선물받은 고추장매콤, 짭짤, 달콤한 맛이 좋다 ⓒ 정현순
남편은 우리가 사는 아파트단지 노인정 회장직을 맡고 있다. 난 고마운 마음에 "그렇지 않아도 올해 고추장을 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고맙게 잘 먹겠네. 내가 그러더라고 그분한테 고맙다고 꼭 전해줘" 하니, 남편이 알겠다고 답한다.
몇 년 전부터 호박 고추장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고추장이 조금 남아 올해는 그냥 넘길까? 담가야 하나? 생각 중이었다. 사실 늙은 호박 두 개를 남겨 놓았다. 고추장 담글 준비는 조금씩 하면서도 내 결정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선물로 받은 고추장 덕분에 고민할 필요 없이 고추장은 올 가을에 담가도 될 것 같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이 내가 고추장을 담가 먹는다면 모두 놀란다. 대부분 사 먹는다고 하면서 "평소에 하는 거 봐서는 그런 거 안 담가 먹고 사 먹을 것 같은데" 한다. 그러면 나는 한 술 더 떠서 "그뿐인지 알아? 나는 된장, 간장도 담그는데" 하면 더 놀란다. 수영장 언니들도 "보기와는 다르게 살림꾼일세" 한다.
내가 장(고추장, 된장, 간장) 종류들을 직접 담가 먹기 시작한 것은 50대 후반인 것 같다. 그 전만 해도 친정이나 언니한테 번갈아 가면서 갖다 먹었다. 마음 놓고 안전한 먹거리들을 갖다 먹을 수 있다는 곳이 있는 게 너무나 좋았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직접 담가먹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너무 당연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부모형제 사이이라도.
하지만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갖다 먹는 게 쉽지 않았다. 나보다 나이 어린 올케한테 장 종류들을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담가서 나누어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네는 가는 김에 얻어오곤 했었는데 시골에 사는 언니한테 일부러 가서 가지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내 나이가 60대를 바라보고 있으니 얻어먹는 것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갖다 먹은 장 덕분에 고추장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만 사 먹었다.

▲작은 항아리아파트살림이지만 애지중지하는 항아리 ⓒ 정현순
지금 생각하니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갖다 먹는 당연함, 사 먹는 편리함도 좋겠지만 조금 번거로워도 기본적인 큰 먹거리는 내가 직접 담가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다.
요즘은 고추장을 담그면 올케는 물론 딸과 며느리도 원하면 조금씩 나누어 주고 있다. 나도 그렇게 고추장을 담가서 나누어 주니깐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느낌도 들었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에 살지만 작은 항아리들을 아직 없애지 못하고 있다.
선물 받은 고추장 맛을 봤다. 매콤하면서 약간 짭짤하면서 단맛도 난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