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용(趙子庸, 1926~2000)은 건축가·겨레문화연구가·에밀레 박물관장·민학회장 등을 지낸 연구가이다. <우리 문화의 모태를 찾아서> 등 값진 저서도 남겼다. 1971년 <경향신문> 에 쓴 '주시록(酒示錄)'은 당시 술자리는 물론 각종 회식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주(酒)여 맥주여, 시원한 술님이여,
목마른 자의 답답한 속을 풀어주시고,
찌푸린 이맛살을 펴주시고,
너그러운 마음씨의 씨알을 심어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하나이다.
세상의 모든 못마땅한 일, 구역질 나는 일,
삐뚫어진 일, 속상한 일, 안타까운 일.
욕하고 싶은 일, 싸우고 싶은 일,
다 잊어버리게 하시니
님의 뜻을 따라 관대하게 안아주겠나이다.
주여, 법주여, 거룩한 술님이여.
법에 눌려 피어날 줄 모르는 째째한 자에게,
법을 뚫고 나가 가슴을 활짝 펼 수 있는 힘을 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하나이다.
창조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법, 왜소한 인간성을 자인하는 법.
형식의 구멍으로 몰아넣는 법,
이런 그릇된 법을 주입한 착각 교육의 주사기를
빼어버리기 위하여
빼라 빼라 하면서 벗어버리겠나이다.
주여, 양주여, 비싼 술님이여.
돈에 어두운 자에게 돈맛을 가르쳐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하나이다
민족의 얼을 되찾으려고 땀흘리는 자,
가엾은 사람을 도우려고 애쓰는 자,
뜻 있는 일을 이끌어보려고 고민하는 자,
이 모든 사람이 돈을 몰라서 허덕이고 있었는데
이제 님으로 하여 돈이 곧 자유와 힘이란 진리를
전도하게 되었사오니
돈 돈 하면서 돈교(敎)나 포교하겠나이다.
주(酒)여, 탁주여, 텁텁한 술님이여,
멋들어진 민족 예술의 주류이시며,
가락과 멋과 신바람의 원천이시며
외세에 휩쓸리지 않고 뼈대 지킨 주체이며
구국의 영웅과 만고 멋쟁이들의 도깨비 국물이신 님이여.
님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는 가엾은 자,
님의 뜻을 거역하고 님을 팔아먹는 자,
님의 멋을 모르고 욕하는 자,
님의 넓고 넓은 사랑을 모르고 슬슬 피하는 자.
이 모든 얼빠진 무리를 용서해 주시옵고,
크고 크신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써
앞 못 보는 겨레를 주시(酒示)하여 주옵소서.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