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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17:17최종 업데이트 26.01.18 17:17

진양호에는 알라딘 램프의 지니가 산다

진주 진양호 소원계단(365계단)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결심을 한다. 더 열심히 살겠다고, 더 나아지겠다고. 하지만 진주 진양호 소원계단에서 만난 새해는 조금 달랐다. 이곳에서 나는 더 빨라지기보다, 더 천천히 걷는 법을 배웠다. 365개의 계단은 소원을 이루는 장치가 아니라,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공공 공간이었다.

진양호에는 소원계단이 있다. 이름 그대로 365개의 계단이다. 숫자만 들어도 다리가 먼저 반응하지만, 막상 발을 올리면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간다. 한 칸씩 오르다 보면 지난해의 시간도 이와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멀어 보였지만 지나고 나니 금세였던 날들. 계단은 그렇게 시간의 감각을 바꿔 놓는다.

 진양호 소원계단. 원형 구조의 아치가 이어지며 계단을 감싼다. 오르며 자연스럽게 시선이 위로 향한다.
진양호 소원계단. 원형 구조의 아치가 이어지며 계단을 감싼다. 오르며 자연스럽게 시선이 위로 향한다. ⓒ 김종신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숨이 차오른다. 그 즈음, 옆길이 나타난다. 무장애 노을길이다. 계단과 숲길이 교차하는 이 지점은 이 공간의 백미다. 잘 나갈 때 삼천포로 빠지라는 말처럼, 여기서는 옆길로 빠지는 선택이 오히려 몸과 마음을 살린다. 숲길로 들어서면 호흡이 먼저 안정되고, 생각은 느슨해진다.

 계단 중간에서 이어지는 무장애 노을길. 계단을 오르다 잠시 숨을 고르기 좋은 숲길이다.
계단 중간에서 이어지는 무장애 노을길. 계단을 오르다 잠시 숨을 고르기 좋은 숲길이다. ⓒ 김종신

도시의 공공 공간이 이렇게 사용될 때, 삶의 속도는 달라진다. 이 계단은 운동 시설이 아니다. 기록을 남기기 위한 관광지도 아니다. 그보다는 시민이 자기 호흡을 되찾도록 돕는 도시의 장치에 가깝다. 소원함이 있지만, 종이에 적지 않아도 괜찮다. 오르는 동안 마음은 이미 한 번 정리되기 때문이다.

 계단 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양호. 겨울빛을 머금은 호수가 조용히 펼쳐진다.
계단 끝 전망대에서 바라본 진양호. 겨울빛을 머금은 호수가 조용히 펼쳐진다. ⓒ 김종신

전망대에 서면 진양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 위에 드리운 능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겨울 햇살이 호수 위에서 부서진다. 힘을 써서 올라온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라 더 깊이 남는다.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 이 지점일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는지보다, 어떻게 올라왔는지가 남는 자리다.

 진양호공원 내 아천북카페
진양호공원 내 아천북카페 ⓒ 김종신

내려오는 길은 늘 가볍다. 오르며 쌓은 생각들이 발걸음과 함께 풀린다. 계단 아래로 내려와 근처 아천북카페에 들러 책을 펼치면 하루의 리듬이 완성된다. 계단은 끝났지만, 하루는 그제야 시작된다.

진양호 소원계단은 거창한 시설이 아니다. 하지만 도시가 시민에게 건네는 쉼의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계단은 말없이 보여준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늘 더 많은 것을 하려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는, 더 적게 서두르는 법을 배웠다. 365계단은 그렇게 한 해의 속도를 다시 정렬해 주는 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에나 이야기꾼 해찬솔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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