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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 impulsq on Unsplash

얼마 전 '왕진'이라는 단어가 잠깐 떠돌았다. '불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붙었지만, 원래 왕진(往診)은 의사가 병원 밖의 환자가 있는 곳, 특히 환자의 집으로 가서 진료하는 것을 말한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거나 병원을 방문하기 어려운 환자의 집을 의사가 방문하여 진료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왕진'이라는 용어보다는 '방문진료', '재택의료'와 같은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병원이나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 의사가 진료하는 것은 법률에 근거하고 있는데, '의료법' 제33조 1항에 의하면 "의료인인 이 법에 따른 의료기관을 개설하지 아니하고는 의료업을 할 수 없으며 [중략] 그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해야" 하지만 예외적으로 "환자나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진료하는 경우"에는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 의료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동법 제15조에는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법규에 따르면, 환자나 보호자의 요청이 있으면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병원 밖이라 하더라도 진료를 할 수도 있으며, 왕진은 이런 의사의 의무를 준수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1950년대 이후 왕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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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 왕진은 병원을 방문하기 어려운 진료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 진행되었는데, 급박한 출산을 맞이하여 왕진을 요청하는 경우가 잦았다. 지방에서도 이런 사건이 종종 있었는데, 산파도 한번 와본 적 없는 강원도 정선의 산골 마을에 위급한 산모를 위해 한달음에 왕진 온 의사와 간호사가 세쌍둥이 아기의 출산을 도왔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실렸다.

원주에서는 출산 직후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산모가 위급한 것을 알게 된 인근 경찰서장이 의사를 왕진하게 하여 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무의촌과 다름없는 지역에 근무했던 의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의과대학이나 인턴 시절 잠깐 산부인과 교육을 받았을 뿐인 외과, 내과 전문의가 수술용 칼과 가위, 혈관 집게, 링거, 탈지면과 거즈 정도만 챙긴 가방을 들고 왕진을 나갔다. 굳이 의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골에서 임신부의 급박한 출산을 돕기 위해 조산원이 자전거를 타고 왕진 가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는 다른 응급상황에도 왕진을 요청하곤 했다. 열이 사십도 내외를 오르내리고 목이 타고 코피를 흘리는 독감 환자,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고 기절한 아이, 신경쇠약과 심장병을 앓고 있는 경우나 연탄가스를 마셔 중태에 빠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왕진을 갔다. 음독자살을 시도하여 위중한 경우나 급성 맹장염에 걸린 환자도 왕진의 대상이었다. 의료시설이 충분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면 이를 돌보기 위해 왕진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왕진은 1950년대 이후 위급한 상황이나 병원에 쉽게 가기 어려운 환자를 돌보는 일상적이면서도 사회문화적으로 용인된 의료행위였다. '용인'되었다는 것은 의료행위로 인정받을 만한 어떤 법률과 제도가 존재했다기보다는, 여러 공공기관이 왕진과 관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주로 야간에 왕진 가는 의사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이 동행하기도 했다. 위급한 환자가 있음에도 왕진을 꺼리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근 혹은 지정된 파출소에 미리 연락하면 경찰이 의사의 왕진에 동행하는 것이었다.

무의촌의 경우에는 경찰이 직접 자동차로 의사를 환자한테 데려다주기도 했다. 단순한 경호뿐 아니라 야간통행 금지로 왕진을 못 가는 상황을 도와주거나, 아예 '야간왕진의원' 설치를 추진하기도 했다. 1957년 서울시의회는 서울 시내 245개 동마다 병원 하나씩을 미리 지정하여 야간왕진을 담당하게 하고, 그 대가로 의약품을 지원하고 보조금을 지급하자는 안건을 결의했다. 이처럼 치안 기관이나 시 당국에서 원활한 왕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공연히 협력했다는 것은, 당시에 왕진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인정받는 의료행위 중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왕진의 쇠퇴

1973년 서울대학교병원 의사 허정은 신문 칼럼에서,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진료하는 왕진이 일상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적었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개업의 수입의 30~40%가 왕진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제 왕진을 청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태도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왕진에 대한 이런 비판은 당시 의료환경의 변화와 관련되는데, 아무리 고명하다 하더라도 "잠자리에서 갑자기 달려온 의사"가 "청진기나 혈압기만으로는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이제는 병원에서 각종 병리 검사뿐 아니라 심전도나 위액 검사도 손쉽게 할 수 있기에 더 정확하게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허정, 1973). 1970년대에는 왕진이 더 이상 적절한 진료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1970년대에 들어 왕진이라는 진료 행위가 점차 사라졌다거나 혹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의료행위처럼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왕진을 요청할 만한 상황이 발생했더라도 과거와 달리 병원을 찾아갈 수 있는 의료환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과거에 비해 왕진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1970년대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병원과 의사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종합병원을 포함한 병원과 의원의 숫자는 195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해 왔는데, (치과나 한의원을 제외하고) 1953년 기준 총 2588개(종합병원 및 병원은 115개, 의원은 2473개)개였지만 1960년에는 총 4013개(종합병원 및 병원 150개, 의원 3863개)로 늘었다(보건사회백서, 1964). 이런 추세는 1970년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종합병원의 경우 1970년 12개에서 1982년 135개로 비약적으로 늘었고, 병원 역시 1970년 223개에서 1982년 275개로, 의원은 1970년 5402개에서 1981년 6604개로 증가했다(김일순, 1988). 이제는 "검은 왕진 가방을 들고 가정을 각 가정을 방문하는 단골의사의 왕진시대로부터 전문의가 많아지고 병의원이나 의료기관이 늘어날수록 올바른 의사나 의료기관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동아일보 1981년 2월 14일).

1977년부터 공식적으로 실시된 의료보험은 환자가 병원을 더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병원을 찾는 경제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까운 1차 병원과 함께 3차 병원까지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병원과 의사의 숫자가 많아지고, 의료보험으로 인해 의료비를 지원받음으로써 왕진보다 병원을 찾는 것이 더 빈번해졌다는 것이다. 왕진 비용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병원을 방문하는 것에 비해 확연히 저렴하지는 않았다.

긴급통화조치법이 시행되기 일 년 전인 1961년 4월 서울시 의사회가 의료비용 인상을 시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병원을 방문하여 진찰받는 비용은 현행 500환이며, 간단한 수술은 1000~3000환, 입원비는 1일 1500환으로 책정되어 있었던 반면, 당시 왕진비는 1000환이었다(경향신문 1961년 4월 24일).

진찰비나 수술 비용을 산정하는 방식이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의사를 요청하는 왕진비가 병원을 찾는 것에 비해 훨씬 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통화개혁(1962년)이나 물가 인상을 고려해도 왕진비가 현격히 인하되지 않은 이상, 다른 의료비용보다 더 낮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왕진을 덜 필요하게 만든 또 다른 배경은 응급수송 체계의 마련이었다. 왕진을 요청하는 경우는 출산이나 음독 등 응급상황이 발생해도 바로 병원을 갈 수 없을 때인데, 1970년대 후반부터 환자를 병원으로 빠르게 이송할 수 있는 안정적인 체계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1979년 9월 대한의학협회(대한의사협회의 전신)의 주도로 '야간구급환자 신고센터'가 설립되었다.

9개월 동안 구급차가 2000회 넘게 출동했고, 3700여 명의 환자가 2차 의료기관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1년 6개월 정도 운영된 신고센터는 1981년 3월 업무를 서울시 소방본부로 이관했다. 민간단체인 대한의학협회가 운영하던 응급환자 신고 및 이송 업무를 공공기관이 이월받은 것인데, 이후 서울시뿐 아니라 전국의 213개 소방서에 신고센터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1983년 소방법 개정 및 119 구급대 창설을 통해 국가 응급의료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 후반부터 체계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응급의료 체계는 의사를 집으로 부르기보다는 의료기관을 더 빠르게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기에, 전통적인 방식의 왕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라지지는 않은 왕진?

1980년대 이후에도 왕진이라는 의료 형태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980년대 후반쯤 되면, 의사가 왕진 가방을 들고 환자의 집을 찾는 것이 30~40년 전의 '목가적 광경'이라거나, 생산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왕진이 바람직한 형태의 의료가 아니며 이제는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이런 왕진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단언도 있었다(동아일보, 1992년 7월 21일). 그렇지만 1977년 의료보험 실시 당시 왕진에 대한 적정 의료보험 수가를 산정할 계획이라는 기사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왕진이 공식적인 의료체계에 포함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농어촌 등 무의촌에서 자연사한 경우가 있을 때 의사가 왕진을 가서 시신을 확인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거나,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된 이후에는 심야 시간에 대수롭지 않은 증상인데도 왕진을 요청한다는 하소연도 있었다. 과거처럼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왕진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병원이 아닌 환자의 가정을 찾아가 진료하는 의료 형태가 과거의 왕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응급환자 혹은 야간에 발생한 환자를 급하게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병원을 적절하게 방문하기 어려운 환자를 일상적으로 찾는 방식이었다. 의료환경이 열악한 서울 빈민 지역의 교회에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여 영세민을 치료하거나, 초음파 치료 등 각종 고가진료를 기본 의료보험료만 받고 해주는 '상계동 슈바이처'의 미담이 알려졌다.

경북 소백산 자락의 보건진료소에 근무하는 '소백산 천사'는 바쁜 농사일로 진료소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오토바이를 타고 왕진을 다녔다고 했다. 이처럼 응급환자에 대한 일회성 처치가 아니라, 병원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일상적으로 돌보는 진료 행위는 다분히 의료인 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병원이 아닌 공간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돌보는 의료행위를 제도화하는 방식이었다. 그중 한 가지 사례는 1991년부터 시행된 가정간호사 제도였다. 원주기독병원은 1974년부터 자체적으로 '지역사회보건간호과'를 두고 여러 명의 간호사를 배치해 주민들에게 가정간호사업을 실시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만성질환자를 비롯하여 가정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가 늘어나면서 가정간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1991년 법적 근거가 마련됨에 따라 1994년부터 시범적으로 시행되었다.

가정간호사 제도는 당시 병원 중심의 의료체계에 변화를 주고 공공의료의 일환으로 저소득층의 의료복지 향상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받았다. 이처럼 왕진이라는 과거의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제도화된 방식으로 병원 밖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돌보는 의료 형태는 지속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공공의료기관과 지자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과거의 왕진은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그렇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된 의료행위였다. 민간의 의료인 개개인의 헌신에 더해 경찰서와 지자체 등 공공기관이 협력해서 열악한 의료환경의 공백을 메우려는 공동의 노력이자 고육지책이기도 했겠지만, 당시로서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어쩌면 당연한 의료행위였다. 따라서 이유 없이 왕진을 거부하거나 진료비를 과도하게 청구하는 행위는 더욱 지탄받기도 했다.

오늘날 병원을 중심으로 훨씬 나은 의료환경이 마련된 상황에서, 병원 밖 진료는 민간 의료인과 공공기관의 긴밀한 협력보다는, 주로 의료인 개인의 결의와 헌신 아니면 공공(의료)기관의 사업이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특정 질병을 앓는 환자(예를 들어 심장질환 환자, 복막투석 환자, 재활환자, 결핵환자, 암환자 등)를 위한 재택의료나, '장애인 건강 주치의' 사업, 노인 의료 돌봄이나 가정용 호스피스 사업처럼, 왕진이라는 용어 대신, 더욱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 방문진료 등이 그것이다(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책임의료 심포지엄, 2024. 10). 그마저도 공적 재정인 건강보험에서 지불하고 있는 방문진료 및 재택진료는 '시범사업'이라는 불안한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변하고 발전해 온 의료환경에서 과거의 왕진을 기대할 수도 없으며 기대해서도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제도적으로 안착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민간과 공공 차원에서 불안전하게나마 왕진과 비슷한 방식의 진료를 해 온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재택의료 역시 제도적으로 자리잡기 전이지만 민간과 공공기관의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수련체계와 보험 적용, 정부와 민간의 협력 및 병원 밖 다양한 상황에 대한 대응책 등 오늘날 공식적인 의료체계에서 과거 왕진의 경험이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참고문헌
「치료비 인상을 획책」, 『경향신문』, 1961년 4월 24일.
「왕진과 가정의 제도」, 『동아일보』, 1992년 7월 21일.
보건사회부, 『보건사회백서』 (1963)
허정, 「왕진보다 병원에 가는 것이 좋다」, 『조선일보』, 1973년 11월 13일.
「건강의학47. 환자수칙 일곱가지」, 『동아일보』, 1981년 2월 14일.
김일순, 「의료전달체계와 의원」, 『대한가정의학회지』 4, 1988, 1-9쪽.
『천 개의 얼굴, 재택의료 퇴원환자 관리부터 완화의료까지』, 2024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책임의료 심포지엄, (2024. 10).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세권은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양 과학기술의 역사 특히 미국 의료의 역사를 공부했고 최근에는 한국 의료의 역사도 연구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외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 및 한국에 미친 영향, 1960년대 이후 한국 의료의 전문화 및 상업화, 의료기술의 역사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면역국가의 탄생 – 20세기 미국의 백신접종 논쟁사』(2024) 등 다수의 번역서와 『영화로 만나는 의료인문학1』, 『질병과 함께 걷다』(2024), 『첨단기술시대의 의료와 인간』(2024), 『새로운 의료, 새로운 환자』(2023), 『환자란 무엇인가』(2023) 등 공저서를 출판했다.


#왕진#의료#병원#FOS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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