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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7 15:06최종 업데이트 26.01.17 15:06

황혼빛이 부채살 같이... 신비로운 부석사 무량수전 차경

늦은 시간에 가서 볼 수 있었던 해 질 녘의 광경

해 질 녘의 무량수전의 차경 땅 거미 드는 아득한 소백의 연봉에 어두운 구름 사이로 황혼 빛이 부챗살 같이 쏟아지는 광경이 장관이며 신비롭다.
해 질 녘의 무량수전의 차경땅 거미 드는 아득한 소백의 연봉에 어두운 구름 사이로 황혼 빛이 부챗살 같이 쏟아지는 광경이 장관이며 신비롭다. ⓒ 라인권

여행의 묘미 가운데 하나가 불시성 또는 불가지성이라고나 해야 할까? 계획에 없던 여행을 훌쩍 떠나거나 여행 일정이 틀어진 탓에 뜻하지 않은 아름다운 풍광을 보게 하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번 경북 영주 부석사 여행이 그랬다. 겨울 초입인 지난 11월 셋째 주간에 경주에서 일을 보고 귀가하는 길에 아들과 함께 한번 가보고 싶었던 부석사를 들르기로 했다. "부석사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방송에서 입에 침이 마르게 예찬하는 부석사의 차경을 꼭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주는 귀갓길의 경유지가 아니라, 경부선을 벗어나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안동휴게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무섬마을과 소수서원을 돌아보고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짧은 겨울 해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 거기서도 나는 오후 늦게 부석사에 온 것이 가져올 행운을 몰랐다.

산사와 저무는 소백 연봉 맨 위의 누각이 안양루이다. 장쾌한 전망은 의상이 이곳이 도량을 세운 뜻을 말하는 듯하다.
산사와 저무는 소백 연봉맨 위의 누각이 안양루이다. 장쾌한 전망은 의상이 이곳이 도량을 세운 뜻을 말하는 듯하다. ⓒ 라인권

솔직히 말하면 실망이었다. 그곳은 그윽한 골짜기도, 수려한 계곡도, 빼어난 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내 목적은 오직 부석사 무량수전의 차경을 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일주문에 이르는 은행나무 길에 떨어진 은행잎은 가을에 몰려온 방문객들의 발걸음에 황금빛 가루가 되어 지난가을의 영화를 애도하고, 길옆 과수원의 사과나무들의 벗은 가지는 맺힌 한처럼 뻗어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들을 올라 안양루에 이르러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돌린 순간 한눈에 산사의 검은 지붕들 너머로 일망무제로 뻗어나가는 소백의 연봉들이 연무 속에 아득하고, 흐린 하늘의 어두운 구름 사이로 황혼에 물든 빛줄기가 부챗살처럼 소백의 준령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이 장관에 단지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따라왔던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한 번 와볼 만하네요. 잘 오셨어요!"

무량수전 배 흘림 기둥 묘한 비율의 곡선이 아름다운 무량수전 배 흘림 기둥 , 장구한 세월에 센 머리 빛 도는 고색 창연한 기둥에 살며시 지친 몸을 기대보았다.
무량수전 배 흘림 기둥묘한 비율의 곡선이 아름다운 무량수전 배 흘림 기둥 , 장구한 세월에 센 머리 빛 도는 고색 창연한 기둥에 살며시 지친 몸을 기대보았다. ⓒ 라인권

안양루를 지나 그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감상하곤 그 센 머리 빛 고색창연한 기둥에 몸을 한번 기대보곤 마당으로 내려가 가장자리에 서서 저녁 연무가 낀 높고 낮은 소백의 연봉 위로, 구름 사이로 황혼빛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에 빠져들었다.

산 자체가 수려하거나 빼어나지도 않은 이 봉황산 중턱에 의상이 왜 이 도량을 세웠는지 알 것 같았다. 장소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은 이런 곳을 이르는 말일 게다. 그저 안양루나 무량수전의 뜰에 앉아서 무심히 그 장쾌한 전망을 보고만 있어도 온갖 시름과 번뇌가 사라질 것 같고, 뻗어나가는 듯도 하고, 세상의 온갖 일들이 내게로 몰려드는 듯도 한 소백의 높고 낮은 연봉들은 삶의 회한과 고뇌도 깊게 하고 사유도 깊게 할 것이며, 아득한 연봉 위에 노을빛 물든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는 기도하지 않아도 신비경에 이르게 할 것만 같았다.

저무는 부석사와 노을진 소백 연봉 이 무량수전의 차경을 무심히 보고만 있어도 시름과 고뇌가 사라지고, 기도하지 않아도 신비경에 이를 것 같다.
저무는 부석사와 노을진 소백 연봉이 무량수전의 차경을 무심히 보고만 있어도 시름과 고뇌가 사라지고, 기도하지 않아도 신비경에 이를 것 같다. ⓒ 라인권

일정에 없이 갑자기 오다 보니 저무는 시간에 왔고, 그 덕에 부석사 무량수전의 차경이 가장 좋을 때가 석양 무렵임을 알지도 못한 내가 "해 질 녘 부석사 무량수전 차경"을 보는 행운을 누리며 어느덧 사십 줄에 든 아들과 초겨울의 추억 한 자락을 만들고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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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그러하듯 나그네 인생도 그러하다. 계획대로 안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며 행운이 되고, 뜻대로 되지 않아 진 빠지게 만들어도 그게 일을 잘되게 하며, 목적한 바를 추구하지만 목적하지 않은 더 좋은 결과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 여행 같은 우리네 인생이며 삶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문득 순례의 길을 노래한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84:6)

부석사 무량수전의 차경에 여수에 젖어 저무는 뻗어 나가는 듯도 하고 세상 온갖 일이 내게 몰려 오는 듯도 한 소백의 높고 낮은 연봉에 만감이 교차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차경에 여수에 젖어저무는 뻗어 나가는 듯도 하고 세상 온갖 일이 내게 몰려 오는 듯도 한 소백의 높고 낮은 연봉에 만감이 교차한다. ⓒ 라인권

뜻대로 되지 않아 진 빠지고 몰려드는 삶의 무게나 군대처럼 닥쳐온 고난에 눌려 있거나, 마음 둘 곳 없는 날이면, 부석사 무량수전의 차경을 찾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기왕에 가려면 해 질 녘이 더욱 좋을 것이다. 해지는 소백의 연봉 앞에서 안양루에 걸린 방랑 시인 김삿갓의 시 <부석사>를 읊조리면 더욱 좋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티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부석사 여행 팁, 무섬 마을과 소수서원을 들러서 부석사를 가실 것, 그러면 자연히 저녁 무렵에 부석사에 도착하여 무량수전의 차경이 가장 좋은 때인 해 질 녘의 무량수전의 차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귀가 길에 좀 멀기는 해도 풍기역 앞의 청국장 맛집을 추천한다.


#부석사무량수전#차경#소백연봉#의상#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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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신대원, 연세대 연합 신대원에서 신학을 했다. 은혜로교회를 86년부터 섬겨오는 목자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이다!"는 지론으로 칼럼과 수필, 시도 써오고 있다. 수필과 칼럼 집 "내 영혼의 샘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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