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가 들어와야 할 곳에 또 아파트를 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는 수치상의 정책 대상이 아니라, 이곳에서 매일 전쟁 같은 출근길과 통학길을 견디는 주민들입니다."
지난 15일 오후 4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 고양사업본부 회의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지축지구 주민들의 날 선 목소리가 회의실을 채웠다. 최근 불거진 지축지구 내 유보지의 용도 변경 논란을 두고, 효자동 주민자치회가 국토교통부와 LH 관계자를 직접 호출해 마련한 '담판'의 자리였다.
이날 간담회는 단순한 민원 청취 자리가 아니었다. 2027년 준공을 앞둔 지축지구의 '마지막 퍼즐'인 유보지의 운명을 놓고, 삶의 질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사업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행사(LH), 그리고 이를 조율해야 할 정부(국토부)가 머리를 맞댄 정책 간담회였다.
"주택 공급 검토" 보도에 뿔난 주민들
이번 사태의 발단은 한 언론의 보도였다. 정부가 주택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기 신도시 등의 유보지를 활용해 주택을 추가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여기에 지축지구가 포함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입주가 완료된 지축지구 주민들에게 이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3호선, 부족한 학교 시설, 지지부진한 차량기지 이전 문제 등 기반 시설 부족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남겨둔 땅에 아파트만 더 짓겠다"는 소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에 효자동 주민자치회가 즉각 행동에 나섰다.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정책 결정 라인에 있는 핵심 인사들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는 최승원 국토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 박정만 LH 고양사업본부장 및 실무진,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실의 정연일 보좌관이 참석했다. 주민 대표로는 주민자치위원들을 비롯해 지축초, 지효초, 지축중 학부모 대표 등 30여 명이 참석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15일 오후 LH 고양사업본부 회의실에서 열린 '지축지구 유보지 관련 정책간담회' 전경.효자동 주민자치회와 학부모 대표 등 30여 명의 주민들이 참석해 LH 및 국토부 관계자들에게 질의하고 있다. ⓒ 박상준
LH "단독 결정 없다... 교육청 의사 확인이 우선"
주민들의 우려 섞인 시선은 먼저 박정만 LH 고양사업본부장에게 쏠렸다. '이미 주택 용도로 변경하기로 결정된 것 아니냐'는 질문이 핵심이었다.
이에 대해 박정만 본부장은 "결정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박 본부장은 "지축지구 사업 준공이 2027년 6월로 예정되어 있어, 그전까지 유보지의 용도를 확정해야 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이 용도를 LH가 단독으로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상황에 대해 "특정 용도로 변경하고자 내부적으로 내용을 확정한 바 없다"며 세간의 의혹을 부인했다. 특히 주민들이 가장 원하는 고등학교 설립과 관련해 "현시점에서 교육청과 교육부의 의사를 확인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박 본부장은 이어 "아직 용도 변경을 위한 용역조차 발주되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만약 향후 용역을 진행하게 된다면 관계 기관 협의는 물론 국토부 승인 등 적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최승원 보좌관이 '주민 의견 반영'을 거듭 강조하자 "주민 의견을 경청하는 기회를 반드시 갖겠다"고 답변했다.

▲(사진 중앙) 최승원 국토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이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최승원 국토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 오른쪽이 박정만 LH 고양사업본부장. 박 본부장은 이날 "유보지 용도를 LH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박상준
국토부 최승원 보좌관 "책상머리 정책 아닌, 현장의 절박함 봤다"
이날 간담회의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최승원 국토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이었다. 그는 정부와 공기업(LH), 그리고 주민 사이의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최 보좌관은 LH 측에 "유보지의 주사업자는 LH이지만, 용도 결정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며 "주민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LH가 특별히 노력해달라"고 강력히 당부했다.
간담회 내내 주민들의 목소리를 메모하며 경청한 최 보좌관은 마무리 발언을 통해 현장에서 느낀 소회를 밝혔다.
"고등학교가 들어서야 할 자리가 빈 땅으로 남아있는 현실, 그곳을 보며 느끼는 주민분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머리로만 알던 정책이 현장에서는 '삶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이날 논의된 내용이 단순히 유보지 하나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주민들은 유보지 활용 방안 외에도 ▲ 교육 환경 개선(과밀학급 해소) ▲ 대중교통 확충(광역버스 노선 신설 및 통학 버스 도입) ▲ 지축 차량기지 이전 등 지역의 묵은 현안들을 쏟아냈다.
최 보좌관은 "대중교통은 시민의 기본권이며 교육은 공동체의 미래"라고 강조하며 "오늘 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의 이정표로 삼아 지자체 및 관계 기관과 긴밀히 소통하겠다"고 약속했다.

▲최승원 국토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최승원 국토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이 간담회 도중 밝은 표정으로 주민들의 의견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그는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의 시작점"이라며 주민 의견 반영을 약속했다. ⓒ 박상준
학부모들의 호소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이날 참석한 학부모 대표들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한 학부모 대표는 "지축지구는 아이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고등학교가 없어 원거리 통학을 하는 고등학생들이 많다"며 "유보지가 단순히 수익을 위한 아파트 부지로 팔려나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주민은 "서울로 출퇴근하는 주민들이 콩나물시루 전철에서 고통받고 있다"며 "유보지를 활용해 주민들을 위한 복합 커뮤니티 시설이나 교육 지원 시설을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LH와 국토부가 단순히 '법적 절차'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실제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주거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 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지축지구 유보지 관련 정책간담회.박정만 LH 고양사업본부장은 용역 발주 시 관계 기관 협의를 약속했다. ⓒ 박상준
'소통의 물꼬'는 텄지만... 남겨진 과제들
이번 간담회는 '주택 공급설'로 불안에 떨던 주민들에게 LH 책임자와 국토부 관계자가 직접 "결정된 바 없고 주민 의견을 듣겠다"는 확답을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국토부 장관 정책보좌관이 직접 현장을 찾아 주민들의 '뒷배'를 자처하며 힘을 실어준 모양새는 이례적이다.
하지만 과제는 여전하다. LH는 2027년 6월까지 사업을 준공해야 하는 시간적 압박을 받고 있다. 교육청과 교육부가 학교 신설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학령인구 감소를 이유로 반대할 경우, 유보지의 용도는 다시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지축 주민의 목소리를 정책의 이정표로 삼겠다"는 최승원 보좌관의 다짐과 "주민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LH 본부장의 약속이 과연 '학교 설립'과 '주거 환경 개선'이라는 실질적인 결실로 이어질지, 지축지구 주민들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지축지구가 속해 있는 효자동 주민자치회는 향후 용역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지속적인 간담회와 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우리는 '숫자'가 아닌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날 LH 회의실 창밖으로 보이는 지축지구는 빽빽한 아파트 숲이었습니다. 겉보기엔 번듯한 신도시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주민들의 삶은 고단합니다. 학교가 모자라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르고, 간이역 같은 지축역 출입구에는 긴 줄이 생깁니다.
최승원 국토부 장관 정책보좌관의 말처럼, 정책 입안자들의 책상 위에서 지축지구는 그저 '주택 공급 목표 달성'을 위한 하나의 숫자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날 간담회에서 주민들이 쏟아낸 것은 숫자가 아닌 '삶'의 이야기였습니다. 내 아이가 다닐 학교, 내가 매일 걷는 거리, 우리 가족이 숨 쉬는 공간에 대한 절박한 호소였습니다.
박정만 LH 고양사업본부장은 "주민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꽉 막혀있던 소통의 벽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낸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2027년 사업 준공 전까지, 유보지가 과연 주민들이 염원하는 '교육과 소통의 공간'으로 탈바꿈할지,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글쓴이는 효자동주민자치회 회장입니다. 주민자치회는 감시자의 역할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의 이정표"라는 정부 관계자의 다짐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지 않도록,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입니다. 도시는 건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