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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마음이 급했다. 버스 파업 소식이 전해진 탓에 평소보다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각을 하진 않을지, 언제쯤 대중교통이 정상화될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발은 더 빨라졌고, 그만큼 주변을 살필 여유는 줄어들었다.

▲미끄러운 도로위를 천천히 지나는 차량들 ⓒ 유수영
집 앞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자마자 이상함이 느껴졌다. 신발 밑창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눈이 쌓인 것도 아니고, 얼음이 눈에 띄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스팔트 도로였지만, 얇게 언 살얼음이 길 위를 덮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블랙아이스였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반사적으로 발에 힘을 주며 균형을 잡았다. '오늘은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길을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상태였다. 휘청휘청, 느릿느릿 걷는 모습들이었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한 버스를 타고 회사 근처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천천히 길을 걷는 도중 뒤쪽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구두를 신은 젊은 여성이 길 위에 넘어져 있었다. 얼른 일어나지도 못하고 얼굴만을 감싼 채였다. 급히 다가가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가방이 열리며 화장품 몇 개가 바닥에 흩어졌다.
"괜찮으세요?" 묻자 그녀는 잠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괜찮아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화장품을 하나씩 주워 건네는 동안,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느껴졌다. 출근길에 길 한복판에서 넘어진다는 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다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도로 위에서는 또 다른 위험이 이어지고 있었다. 차량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지나가던 중, 갑자기 헛바퀴가 도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타이어가 얼음 위에서 힘없이 미끄러지며 공회전하는 소리였다. 몇 대의 차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도로 위에서 휘청거리며 방향을 틀기도 했다.
차량 안에 탄 운전자들의 표정이 유리창 너머로 스쳤다. 긴장한 듯한 얼굴과 핸들을 꽉 잡은 손이 보였다. 다행히 속도를 충분히 줄인 상태였기에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차량들은 잠시 멈췄다가, 아주 느린 속도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답답하게 느껴졌을 속도였지만, 그날 아침만큼은 그 느림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넘어진 여성을 다시 한번 살피고는 각자의 길로 향했다.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다시 발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길을 건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얼음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피할 수 있었다.

▲도로를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 ⓒ 유수영
회사 건물에 도착해 외투를 벗고,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침에 넘어졌던 그 여성과 다시 마주쳤다.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혹시 아픈 데는 없냐고 묻자 그녀는 이번엔 조금 편안한 얼굴로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서로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업무를 시작하고 나서도 아침 장면이 머릿속에서 얼른 지워지지 않았다. 블랙아이스는 늘 이렇게 사람을 방심하게 만든다. 눈이 쌓여 있거나, 얼음이 눈에 띄게 보였다면 누구나 조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길 위에 얇게 깔린 얼음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위험을 알기 어렵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러 나서던 길, 복도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다가와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아침에는 너무 경황이 없고 부끄러워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했다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컵에는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고, 빙판길 조심하세요.'

▲감사함을 담은 포스트잇이 붙여진 커피 한 잔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다. ⓒ 유수영
짧은 몇 줄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보이지 않는 얼음 위를 지나야 했던 아침, 낯선 사람 사이에서 오간 작은 배려는 출근길을 조금 덜 차갑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