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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서울 생활이 끝났다. 서울 관악구의 햇볕 안 드는 자취방을 떠나 다시 남향하게 되었다. 새 삶의 터전이 될 곳은 엄밀히 따지면 부산광역시에 있지만, 성장기에 10년 넘도록 살았던 양산과 지하철로 20분도 안 되는 거리다. 사실상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다.

양산시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자부하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한동안 감을 잡지 못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양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자기 고향 오사카를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작 애정에 마지않는 지역에 누를 끼칠까 봐 키보드 앞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사를 앞둔 지금, 이 난제가 다시금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민하지 않는 척 치열하게 고민하던 도중, 서점 검색대에서 무작정 지명을 타이핑하자 뜻밖의 책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약국 작가의 <양산 :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이다.

흑백 만화로 덤덤하게 담아낸 지역 이야기

 책표지
책표지 ⓒ 삐약삐약북스

<양산 :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은 독립만화 전문 출판사 삐약삐약북스의 기획으로 탄생했다. 서울을 제외한 비수도권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만화 '지역의 사생활 99' 시리즈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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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단연 화풍이다. 컷 수가 많은 웹툰부터 단일 작품인 일러스트레이션까지 '풀 채색'과 디지털 후보정을 거치는 시대에, 이 작품은 깔끔한 펜 드로잉이 돋보인다. 흑백으로 작업된 만화에서 고전적인 스크린톤(흑백 만화에서 다양한 회색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패턴)의 흔적 역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림체와 실존하는 양산의 풍경이 만나, 관념적인 풍경을 고스란히 구현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본작의 스토리 역시 화풍 만큼이나 단순하고도 명료하다. 오래전 대학에서 연극영화과 활동을 함께했던 두 인물 '경민'과 '은수'가 양산에서 재회하며 일어나는 변화를 다루는데, 그 중심에는 코로나19 대유행과 그 시기에 시도된 하북면 재개발이라는 이슈가 있다. 1933년 개장한 지역 대표 테마파크 통도환타지아가 무기한 휴장에 돌입하면서 쇠락의 길에 접어든 하북면 상인들의 이야기가 만화 곳곳에 서늘한 존재감을 남긴다.

공무원으로서 재개발 추진에 힘쓰고자 하는 경민. 그리고 상인의 처지에서 턱없이 부족한 시 측의 보상안을 협상해 보려는 은수. 이 둘이 대립하면서, 개인의 갈등과 지역사회의 갈등이 평행선을 이루게 된다. 영화라는 꿈 하나에만 의존했던 두 중심 인물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제각기 다른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과, 유원지 관광을 통한 수입이 끊겨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상인들의 모습이 같은 구조적 갈등을 띠어 양쪽 플롯에 전부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든 세심함이 돋보인다. 웬만한 르포 못지않게 지역 현안을 파고들면서, 만화라는 장르적 몰입감까지 잡아낸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지역 청년들

비교적 무거운 소재를 다루긴 했지만, 그래도 <양산 :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은 낙담과 비관으로 치닫지 않는다. 작중 은수는 지친 상인들의 뜻을 받아들여 재개발 보상안 협상을 법정 싸움으로 끌고 가는 것은 포기하지만, 오래전 공부했던 영화의 감각을 살려 현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은수의 이러한 여정은 작품의 제목과 맞닿아 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과 불교의 대표 경전 <법구경>의 두 경구가 충돌하는 순간, 현실과 꿈을 바라보는 은수의 각기 다른 두 가지 입장 역시 충돌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깊이가 깊을수록 인간이 위대해진다고 한 반면, 법구경에서는 아득한 어둠 속에 묻혔다면 촛불을 밝혀 불안을 걷으라 했다.

작품 극초반의 은수가 '실패했을 때의 실망감이 두려워' 꿈에 모든 걸 바치지도 못하고 현실에 완전히 발을 디디지도 못하는 중간자적 입장이라면,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결심한 후반의 은수는 영화라는 꿈을 촛불처럼 사용해, 양산의 현실이라는 불안을 걷는 존재가 된다.

이번엔 실패하더라도 온 마음으로 구겨지고 싶지 않아서, 기꺼이 구차해지기로 했다.

짧은 단편 안에서도 이처럼 확고하게 드러나는 캐릭터의 발전상은, 실패작으로 낙인 찍힐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다시금 덤덤히 지방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과도 이어져 있다.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개인적 여정, 냉혹한 현실을 담아낸 지역 서사, 그리고 이를 읽는 비서울 거주민의 마음이 맞물리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단편인 것이다. 단행본 끝에 수록된 최윤주 만화평론가의 저자 인터뷰 역시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아무래도 한동안 양산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쓰지 못할 것 같다. 더 많은 고민과 치열한 준비가 필요한 과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산 :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이라는 탁월한 이정표가 존재하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감을 얻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방 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화두가 유령처럼 한국을 떠도는 지금,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희망을 손에 쥐고 싶다면 <양산 :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서재에 웬만한 르포 부럽지 않은 웰메이드 만화책이 꽂히게 될 것이다.

지역의 사생활 99 : 양산 - 시즌 2, 키르케고르와 법구경

약국 (지은이), 삐약삐약북스(2021)


#양산#지역의사생활99#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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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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