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안성기 배우의 빈소에 추서된 금관문화훈장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고 안성기 배우의 빈소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두말할 나위 없이 6·25 전쟁이죠."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렇게 답한다. 수학능력시험과 모의평가 때마다 출제되는 단골 문항으로, 선다형의 정답은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늘 인천상륙작전이다. 아이들이 발발한 해와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전체 역사를 통틀어 몇 안 되는 사건이다.
띄엄띄엄 아는 6·25
문제는 그게 사실상 알고 있는 내용의 전부라는 점이다. 6·25를 모르는 아이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중국군의 개입과 1·4 후퇴 말곤 떠올리는 단어가 없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 이념 갈등이 남북 분단의 모순에서 비롯됐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6·25에 대한 아이들의 무지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요즘 아이들은 전쟁을 마치 온라인 게임으로 여기거나 희화화한다. 개전 초 이승만 대통령이 후퇴하며 한강철교를 폭파한 사건을 두고 '런승만'이라 조롱하는가 하면, '원산폭격'조차 어디서 비롯된 표현인지도 모른 채 마구 사용한다. 중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의 폭사를 두고 '볶음밥을 해 먹다 죽었다'라며 낄낄거린다.
6·25를 띄엄띄엄 알다 보니 왜곡된 사실을 진실처럼 믿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교과서에서 소략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은 내용은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낳으며 온갖 억측이 난무하기도 한다. 교과서를 핑계 댈 것도 없다. 관련 사료가 부족해서라기보다 분단의 현실과 이념적으로 양극화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모두가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다.
역사 교사조차 아이들 앞에서 6·25 관련 이야기는 웬만하면 삼간다. 자칫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민원에 시달릴 수 있어서다. 6·25를 비롯해 현대사 영역의 사건과 인물의 경우, 자주 출제되는 내용만 다루고 구렁이 담 넘듯 눙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이들 스스로 현대사는 교실이 아닌, 유튜브를 통해서 공부한다고 선선히 말하는 지경이다.
빨치산에 대한 편견과 오해
대표적으로, '빨치산'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심각한 상황이다. 빨치산이 비정규 게릴라 부대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됐다는 건 대부분 알고 있지만, 이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연결해 내진 못한다. 이른바 외교 독립론과 무장 항쟁론이 독립운동의 두 축이라는 사실이 교과서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그렇다.
아이들은 빨치산을 북한군과 동일시한다. 한 아이는 '빨갱이의 군대'를 가리키는 말이라며 알은체하기도 했다. 자타공인 역사 마니아라는 아이들조차 북한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그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무장 공비 집단 정도로 이해한다. 보통 명사인 빨치산이 그들에겐 김일성이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고유 명사로 탈바꿈된 셈이다.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본디 일제강점기 중국 본토와 만주 지역에서 풍찬노숙하며 일제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인 유격부대원을 두루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불렀고, 그 호칭에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북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벌이던 김일성은 빨치산의 한 사람이었을지언정 감히 빨치산의 역사를 대표할 순 없다.
"선생님, 혹시 <남부군>이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나요?"
한 졸업생 제자와 얼마 전 타계한 영화배우 안성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그가 주연한 영화를 찾아보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했다. 요즘 영화와는 달리 영상도 흐릿하고 상영시간이 워낙 길어 망설였지만, 영화계 대배우의 죽음을 추모하는 뜻에서 끝까지 시청했다며 스스로 대견스러워했다.

▲영화 <남부군> ⓒ 남프로덕션
대화는 영화배우 안성기에서 6·25와 빨치산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그는 지금껏 빨치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된 38도선 이남의 북한군을 지칭하는 용어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38도선 이북의 북한군과 구분하기 위해 '남부군'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 아니었느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빨치산이 6·25 남침 이후에야 조직되어 활동한 이들로 알았던 거다.
물론,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해방 이후로 한정해도, 빨치산은 미소 냉전과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분단을 획책하는 자들에 맞서 싸운 이들을 일컫는다. 여순 사건 당시 이승만 정부의 제주 4·3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며 무장봉기를 일으킨 주동 세력의 일성도 단독 정부 반대와 조국 통일이었다.
무장봉기가 진압되면서 살아남은 주동 세력의 일부는 지리산과 백운산, 회문산 등지로 숨어들었고,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에 맞서 저항을 지속해 나갔다. 6·25 발발 이전에도 전국 각지에서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미 6·25는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과의 첫 만남
"영화의 주인공은 이태(안성기 분)지만, 진짜 주인공은 정작 영화 속엔 등장하지도 않는 이현상인 것 같아요. 마치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은 안옥윤(전지현 분)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김원봉(조승우 분)과 노덕술(이정재 분)인 것처럼요."
그에겐 '빨치산의 총사령관' 이현상과의 첫 만남이었고, 영화는 빨치산에 대한 편견을 깨는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교과서에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는 이현상이 일제강점기 35년 중에 무려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과 전쟁 중 이승만 정부가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었다는 점에 놀라워했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을 만한 행적이라는 거다.
그는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추위와 굶주림이라는 그 혹독한 시련을 견디게 한 빨치산의 초인적 힘이 과연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해 본 계기였다고 했다. 무엇보다 김일성이 정전협정 체결 직후 남로당 세력을 숙청하고 남쪽에 고립되어 토벌대에 쫓기는 빨치산을 내팽개친 사실에 주목하고, 6·25 전후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며 뿌듯해했다.
얼추 30년 전 영화에 대한 갓 스무 살 청년의 감상평은 그의 후배들을 가르쳐야 하는 내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6·25와 남북 분단을 예나 지금이나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이념 대립으로만 이해한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패권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여전히 미국은 우리 편이고 러시아와 중국은 적으로 여긴다.

▲회문산 전적비. 회문산은 여순 사건 직후 이현상이 토벌대의 진압을 피해 입산한 빨치산들을 규합해 활동했던 곳이다. ⓒ 서부원
이현상이 추종했던 박헌영과 이승엽 등은 '미제의 간첩'으로 내몰려 김일성의 손에 처형당했고, 지리산을 떠돌던 그 역시 버려졌다. 일설에는 남로당 세력의 숙청과 맞물려 그도 남부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위를 잃고 김일성의 심복에게 피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듯 빨치산의 대표 격인 이현상의 불꽃 같은 삶은 남과 북에서 모두 말하길 꺼리는 흑역사로 남았다.
그는 이현상이라는 이름이 역사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해방과 6·25 전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엔 그의 생애만 한 사료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가 피살된 후 이승만 정부는 '빨치산의 종말'을 선전할 목적으로 그의 시신을 서울에서 보름 동안 전시했고, 그의 독립운동 공적과 인간적 품격을 존중한 토벌대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장례식을 치러주었다는 사실은 교과서에선 배울 수 없는 역사적 교훈을 준다는 거다.
올해 수업에선 빨치산의 역사를 현대사 단원의 주제 한 꼭지로 삼아도 괜찮을 성싶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비판적 시각으로 해석하면서 기존의 편견에 맞서는 힘을 기르는 게 역사교육의 본령이다. 빨치산의 역사를 공부해 나가다 보면,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지평이 시나브로 넓어지게 될 것이다.
"혹시 이 영화의 감독과 출연한 배우들이 국정원에 모조리 끌려가지 않았나요?"
영화 <남부군>과 이현상에 관해 제자와 나눈 사뭇 진지한 대화는 당혹스러운 질문으로 마무리됐다. 영화가 제작된 때가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전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권위주의 시대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소재로 삼은 게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그의 자문자답식 결론은 '안성기'이니까 가능했다는 거였다. 역사 교사로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