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무위당 장일순이 살았던 (1928~1994) 시공은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해방→미 군정→6·25 동족상쟁→이승만 독재→4월 혁명→박정희 쿠데타→유신정변→민주화운동→전두환 쿠데타→광주민주화운동→6월 항쟁→노태우 집권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과 격변의 시기에 지식인들의 행태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부류는 세상 변하는 대로 따라 변하면서 적당히 처세하여 권력·부·명예를 누리는 여세추이(與世推移)파.
둘째 부류는 구조악에 도전하고 불의에 저항하면서 사회정의를 구현하고자 나서는 행동하는 지식인 그룹.
세 번째 부류는 독재자나 외세를 추종하면서 이권을 챙기고 반동적 언사를 일삼는 수구파.
네 번째 부류는 "이런들 어쩌며 저런들 어쩌리" 따위를 읊조리며 세상사에는 무관심하는 오불관언파.
조선 중·후기 이래 사색당쟁이 극심하여 정치나 사회에 참여했다가는 자칫 3족이 멸하는 사화를 겪으면서 '괜찮다'라는 말이 '관계하지 않는다'에서 파생이 되고, 이런 흐름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까지 이어지면서 다수의 지식인들은 친체제·어용화되고 여세추이 또는 오불관언의 길을 택하였다.
여세추이파가 주류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식민지·분단·독재의 온상이 되고, 한국 사회는 정도(正道)보다는 사도(邪道)가 판치고, 합리주의자보다 기회주의자들이 주역 노릇을 하였다. 우리 근현대사는 독립운동가보다 친일파, 민족자주보다 사대주의, 통일정부보다 분단정부, 남북협상보다 단독정부, 민주인사보다 독재세력, 남북화해보다 냉전수구파가 득세하였다. 때로 정통세력이 승리하는 듯 했지만 얼마 안 되어 변통세력에 내몰리고, 역사는 다시 반동기를 겪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장일순은 입신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청소년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피난민과 저소득층 자녀들이 중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방치되는 안타까운 실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입신양명 대신 이들의 교육에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참됨의 가치를 교육이념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참되게 살고자 다짐하고 노력하였다. 장일순의 생애를 관통하는 주제어의 하나는 '참됨'이었다.
4·19혁명 공간에서 중립화통일론을 역설했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장일순은 중립화통일론을 이유로 쿠데타세력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8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죄 지은 일 없이 3년의 옥살이까지 하게 되었다.
박정희의 권력욕은 1972년 10월 유신쿠데타로 이어졌다. 3권을 귀일시키는 유신체제는 한국판 총통제와 다르지 않았다. 민주주의 헌정질서가 뿌리채 뽑히고, 이에 저항하는 학생·지식인·노동자들이 수없이 구속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되고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이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공안검사들은 이들을 용공좌경으로 몰았다.
장일순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곁으로 찾아오는 피신자들을 보호하는 한편 각계의 민주인사들과 연대하여 구속자 석방과 유신헌법 폐기운동에 나섰다. 원주 봉산동 그의 거처에는 '시대의 양심'들의 은신처가 되고 반독재 투쟁의 전략본부 구실을 하였다.
장일순은 49살 때인 1977년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는다.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깨닫고, 이제까지의 인권운동·농촌운동·노동운동을 공생의 생명운동으로 전환하고자 시도한다. 정신적인 일대 비약이었다. 멀리는 노자의 자연사상, 한말 해월 최시형의 인시천(人是天)사상, 인도 간디의 아힘사를 바탕으로 삼아 자신의 생명사상을 정립한다.
장일순의 생각이다.
"돈을 모시지 말고 생명을 모시고, 쇠물레(기계)를 섬기지 말고 흙을 섬기며, 눈에 보이는 겉껍데기를 모시지 말고 그 속에 들어가 알짜로 값진 것을 모시고 섬길 때만이, 마침내 새로운 누리가 열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풀 하나에, 낱알 하나에 우주가 다 있는 거고, 이천식천(以天食天)으로 밥 한 사발을 먹는 것도 우주를 영(迎) 하는 것이고, 수 많은 농부의 피땀과 하늘이 함께 해주니까 식사한다."
사람과 하늘과 자연만물이 혼연일체라는 해월의 사상을 20세기 말 한국사회에 소환하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지구와 인류를 구원하자는, 21세기형 가치관이었다. 그렇다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1980년 전두환의 폭거로 산산히 흩어진 민주세력을 다시 결집하여 '민주통일국민연합'을 발족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장일순의 생명운동은 1983년 도농직거래조직인 '한 살림'을 창립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농민과 소비자를 연결하여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이것을 저렴하게 소비함으로써 농토와 국민건강을 함께 보호하자는 생명운동이었다. 이 역시 그 시기에 필요한 시대정신이었다.
좁쌀 한 알 또는 나락 한 알로 자처한 장일순은 70년대에 사용한 무위당(無爲堂)이라는 호에서 그의 삶과 사상이 오롯히 담긴다. "인위적으로 일을 만들거나 사욕으로 무엇을 시도하지 않으며, 내 것이라는 소유를 비우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감으로써 일체의 근원과 합일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원래의 호는 호암(湖巖)이었으나 1960년대에 청강(靑江)으로, 70년대에 다시 무위당으로 바꿔 썼다.
1980년대 이후 타계할 때까지는 일속자(一粟子)라는 호를 주로 사용하였다. 좁쌀 한 알에도 사람·하늘·우주만물이 숨쉬고 있음과 더불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서 작은 씨앗의 생명이 되고자하는 뜻이 담겼다. 한 때는 서각(鼠角)을 호로 쓰기도 하였다. '쥐뿔'이라는 뜻으로,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겸손함을 나타낸다.
그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도덕적인 순수성을 지키며 고결하게 살았다. 세속적 출세의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한국사회 주류와는 격과 결이 다르게, 오히려 수렁으로 빠지는 쪽을 택하였다. 그러면서도 고결하게 살았다.
무위당 장일순의 또 다른 특색이라면 틀에 박힌 것을 무시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그것도 도덕적인 품위와 순수성을 지키면서 일관되게 걸었다는 점일 것이다. 어느 평자는 "제일 잘 놀다간 자유인"이라 하였다. 그는 자유인이었고, 그 자유는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가는 길에는 동반자도 적지 않았고, 뿌린 씨앗도 많았다. 하여 동시대 세속의 '성공자'들이 앉았던 자리와 비교되고, "그이처럼 살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가치관의 새 지평을 열어보였다. 이 부분이 그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 아닐까 싶다. 고결한 삶만이 남길 수 있는 유산이다. 시대정신을 일깨우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홍길주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문장보다 귀한 것은 몸을 지키는 위엄을 갖추는 데 있다. 지위가 낮아 미천하고 문장도 별반 놀랄만한 것이 없는데도, 가는 곳마다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지위가 위세당당하고 문장도 화려함을 갖추었는데도, 가는 곳마다 능멸과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 어째서 그러겠는가." 어째서 그럴까. 시대정신을 일깨우면서 '참되게'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위당은 높은 관직은 물론 책 한권 쓰지 않았는데도 가는 곳마다 존경을 받고,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워하고 따르는 사람이 줄을 선다. 왜일까? 지식인으로서 정직함과 엄격성, 불의에 맞서는 장렬함과 자신에 대한 청렬함, 시대를 앞서가는 시대정신과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모습에서, 시공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무위당은 일속자(一粟子)의 낙관으로 쓴 글씨에서 자신의 삶을 압축하고 있다.
萬古長空 一朝情華 (만고장공 일조정화)
영원한 시간과 공간에서 어느 아침 피어난 꽃.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