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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는 정약전 최익현 등 유배인들의 비석이 있다.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는 정약전 최익현 등 유배인들의 비석이 있다. ⓒ 신안군

봉건왕조 시대 비판적인 학자나 선비·관료들을 산간벽지나 오지, 낙도 등 험지로 유배시켰다. 귀양이다. 극렬한 인물은 처형 또는 감옥에 집어넣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유배를 보냈다. 우리 국문학사는 유배문학이 하나의 장르를 이룰 만큼 빛을 발한다.

유배지는 창조적인 공간이 되고 후대에는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정권은 수형자들의 붓을 빼앗고, 일체의 집필행위를 금지시켰다. 입틀막과 함께 '손틀막'을 자행한 것이다. 민주인사들은 감옥에서 한 달에 한 번, 그마져 공개된 봉함엽서를 통해 직계가족과만 소통케했다.

이들 독재정권이 양심수들에게 붓을 허용했다면, 얼마나 값진 글이 생산될 수 있었을까 생각하고 안타깝고 분하다. 봉건군주보다 못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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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유배문학은 정암 조광조, 고산 윤선도, 교산 허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서포 김만중 등 쟁쟁한 문인·학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제외하면 우리 국문학사는 텅빈 곳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어느 시대나 개혁에는 반동이 따른다. 기득세력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혁명은 그야말로 혁명적 방법으로 현안을 처리하지만 개혁은 기존의 법제와 관습에 따라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38세에 대사헌에 올라 지치주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개혁에 나섰다. 훈구 세력이 똘똘 뭉쳐 음해와 모략에 나섰다.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까지 동원하였다. 희빈 홍씨는 궁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글자를 쓰고, 그 글자 위에 꿀물을 발라서 벌레들이 뜯어먹게 하여, "조씨가 왕이 된다"라는 주초위왕의 나뭇잎을 중종에게 갖다 주었다.

중종은 그토록 신뢰했던 조광조가 개혁의 구실 아래 자신의 자리를 탐하는 역도로 인식하고 수감하여 혹독한 고문 끝에 전라도 능주로 유배시켰다. 훈구세력은 라이벌을 천리 밖으로 유배하고도 편안치 않았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유생들과 동경하는 민심 때문이었다. 사약을 내렸다. 금부도사가 유배현장을 찾아 이를 전했다. 조광조는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정좌하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일을 내 집 일 같이 걱정했도다
밝디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오니
거짓 없는 이 마음을 환히 비춰주나.

시신은 현지에 가백장하였다가 이듬해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 심곡리에 반장하였다.

뒷날 율곡 이이는 정암의 묘지명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기자 때부터 시작되었다.
교화는 멀어지고
교훈은 없어져서
떨어져간 실마리를
쫓아간 길 없어져
아 한편 선열이
혼탁한 시대에서
홀로 제창하였으니
각우절타(刻羽絶타) 하여
미미하게 되었도다
하느님이 이 도를
버리지 아니하사
선생은 이 땅위에
특별히 내리셨다.(후략)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서울에서 태어나 8세 때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에서 자랐다. 당시 금서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성격이 강직했던 그는 1616년 광해군 정부에서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박승종·윤문 등 당시 실세들의 죄상을 격렬하게 파헤쳐, 이들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견회와' 등 시조를 짓고, 1년 뒤 경남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제거되면서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다.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옮겼다. 그 뒤 참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6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1634년 강석기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해남에서 지냈다.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굴욕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했다. 이곳에 낙석재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1638년 경북 영덕으로 귀양 갔다가 1년 뒤 해배되어 보길도로 돌아왔다. 이후 관계와 연을 끊고 보길도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시작에만 열중하였다. '산중산속'이다.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나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니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등 정정의 변화에도 그는 보길도에 눌러앉아, 시작에만 열중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어부사시가' 등 명작이 쓰였다.

앞 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어라
밤물은 거의 지나고 낮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빚이 더욱 좋다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바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싯대 지고 있다. 탁주병 실었노라.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 글씨와 '세한도'의 그림, 제주도 유배 등 너무 잘 알려진 인물이다. 55세 때인 1840년이었다. 제주 화북전에 도착하여 붓을 들었다.

마을 안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는
귀양살이 신하의 얼굴 가증도 하지
마침내 죽을 고비 넘어서 다다른 곳
남도에 미친 은혜, 파도도 잔잔해.

추사는 금석문(金石文) 연구에 몰두했다. 시·서·화에 전각까지 일가를 이루었다. 낙도에 위리안치된 지 8년 만인 1848년 12월 해배 통보를 받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개인에게 유배 8년은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민족문화의 유산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붓의 향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붓의#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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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붓의 향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율곡의 개혁론 '만언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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