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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5분 정도 거리에 도서관과 박물관을 품은 작은 산이 있다. 종종 머리를 식히러 그 산에 오른다.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타고 걷다 보면 차오르는 숨이 답답함을 밀어내는 기분이 든다.
1월 4일 일요일 오후에도 산으로 향했다. 높이가 낮은 동산 수준이라 한 시간 남짓이면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기에 충분하다. 그날도 정상에 올라 트인 시야를 느끼며 잠시 머무르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산 입구 쪽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그곳 벤치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무리가 앉아 있었다. 모두 함께 모여 있었지만 각자 손에 쥔 휴대전화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는 없었다. 잠시 멈춰 서서 지켜보는 몇 분 동안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아이에게 건넨 말
슬그머니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얘들아, 뭘 보고 있어? 아줌마가 보니까 휴대전화만 보던데,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는 거야?"
아이들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거 우리 반 애들도 다 보는 건데요. 안 보면 친구들이랑 말이 안 통하거든요."
슬쩍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니 유튜브 속 한 방송이 재생되고 있었다. 한껏 높아진 목소리와 과장된 말투,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이어졌다. 이걸 아이들이 즐겨 본다는 사실에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평소엔 뭐 하고 놀아?"
"평일에는 학원 다니느라 못 놀아요. 학원 갔다가 집에 가면 10시가 넘고, 또 숙제하면… 아, 벌써 가기 싫다."
나는 특별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자상하거나 활동적인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방금 떠올린 수식어들 중 하나쯤은 되어봐야 할 것 같았다. 우습지만 작은 용기를 내 아이들에게 제안했다.
"잠깐 나랑 놀아줄 수 있을까? 아줌마가 어릴 때 하던 놀이인데, 너희들 보니까 그때 생각이 나서."
다섯 명 중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콘크리트가 아닌 흙바닥이 보였다. 그 위에 선을 그어 사방치기 놀이판을 만들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아이들이 다가와 방법을 물었다. 근처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를 아이들 손에 쥐여주고 놀이 규칙을 설명했다.

▲사방치기기사를 낼 생각을 하지 못해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기 때문에 AI에게 부탁하여 사방치기 그림을 만들어 봤다. ⓒ 유수영
그 순간,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학원 생활에 지쳐 있던 아이들에게 드라마 속 구교환 배우가 한 말이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처음엔 아이들의 발이 선 앞에서 멈칫거렸다. 돌멩이를 던지는 힘 조절도 쉽지 않아 사각형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탄식이 섞인 아쉬운 소리를 내면서도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규칙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줄을 섰다. 한 아이는 넘어질 듯 휘청휘청했고, 제법 키가 컸던 다른 아이는 한 발로 균형을 잡다 결국 두 발을 땅에 디뎠다. 그렇게 규칙과 요령을 익히며 금방금방 다음 차례로 넘어갔고, 그 사이 아이들의 얼굴엔 들뜬 표정이 가득해졌다.
놀이가 조금 익숙해지자 아이들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돌멩이는 원하는 위치로 잘 던졌고, 한 발로 뛰는 동작도 점점 가벼워졌다. 옆에서 기다리던 아이는 친구를 보며 박수를 쳐주고, 차례를 마친 아이는 또 다른 아이를 위해 함성을 질렀다. 누가 더 잘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휴대전화는 벤치 위에 그대로 놓인 채, 한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아이들은 어느새 휴대전화 화면에서 벗어나 땅에 그어진 선 위를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하늘 위로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날아갔다. 나는 혼자 남아 있던 아이 옆자리에 앉았다.
"너는 왜 같이 안 놀아?"
"저는 움직이는 것보다 앉아서 유튜브 보거나 책 읽는 게 더 좋아요."
아이는 언론인이 꿈이라고 했다. 열두 살의 나이에 제법 구체적인 꿈을 가진 것이 기특해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왜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묻자 아이는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줌마가 <오마이뉴스>에서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거든. 궁금한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우와, 정말요? 아줌마 너무 멋있어요."
그러는 사이 아이들의 휴대전화에서 차례대로 벨 소리가 울렸다. 몇 마디 통화를 마친 아이들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집에 가니?"
"아니요, 마라탕 먹으러 가요."
"집에 안 가고?"
"엄마, 아빠가 오늘도 일하거든요. 밥 사 먹으라고 전화한 거예요."
"그러면 가기 전에 화장실에서 손 씻고 가야 해. 알겠지?"
아이들은 꾸벅 인사를 하며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떠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어쩐지 허탈해 보였다.
"얘들아, 다음 주 토요일에도 만날래? 오늘 이 시간에 또. 다음엔 다른 놀이를 가르쳐줄게."
다섯 명의 아이가 너나 할 것 없이 크게 "네"라고 대답했다. 골목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중 언론인이 꿈이라고 했던 아이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아줌마, 인스타그램 아이디 알려줄 수 있어요?"
"그건 왜?"
아이의 얼굴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아줌마한테 디엠 보내려고요."
"아줌마가 인스타그램은 잘 못 해. 대신 카카오톡 아이디 알려줄게."
아이는 내 카카오톡 아이디를 받아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끈대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1월 5일. 오마이뉴스에 송고할 기사를 쓰던 중, 아이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 주에는 어떤 놀이를 가르쳐줄까?

▲언론인이 꿈이라던 아이가 보내온 메시지. ⓒ 유수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