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누수로 인해 아래층에 폐가 되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얼마나 투덜댔던가. 빨리 이 집을 내놓고 이사를 가야겠다고. 낡은 이 집은 너무 손이 많이 갈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피해를 주니 정이 가지 않는다고. 아랫층에 내려가 공사를 해 주면서 빨리 이 아파트를 탈출하고 싶어 졌었다.
이번에 고른 그림책을 펼쳤다가 뜻밖에 집에 대한 미안함이 살짝 밀려옴을 느꼈지만 여전히 난...

▲책표지마음의 모양 ⓒ 길벗어린이
집도 집이 필요해
이 책은 '집'이라는 단어를 삶의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비를 막는 지붕이나 몸을 누이는 공간을 넘어, 마음이 머무는 장소로서의 집을 묻는다. 이야기는 사소한 일상에서 시작된다. 주말의 약속, 오래된 수도꼭지, 영화 속 고양이 한 장면. 그 평범한 장면들 사이로 균열이 생기고, 집은 갑자기 상처 입은 존재처럼 말을 걸어온다.
어느 날, 집안의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집'은 상처를 받는다.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수도꼭지가 또 말썽이야. 그뿐인가! 지붕은 페인트가 다 바래서 대머리가 되어 간다고. 나도 이런 구닥다리 집이 아니라 겨울의 스웨터 같은 따뜻하고 아늑한 집에서 살고 싶어!"
집은 이 책의 서술자로서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이유는 자신도 겨울의 스웨터 같은 따뜻하고 아늑한 집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일상의 균열, 마음의 질문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서술자의 시선이다. 인간이 아닌 '집'이 느끼는 서운함과 외로움,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낡았다는 이유로, 불편하다는 이유로 쉽게 밀려나는 존재의 마음을 이토록 다정하게 그려낸 이야기는 흔치 않다.
집이 가출을 결심하고 숲으로 나서는 장면은 우화처럼 가볍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가볍지 않다. 숲에서 처음 만난 달팽이에게 스웨터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집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묻는 집. 달팽이는 자신의 집이 이미 충분히 따뜻하다고 말하며 철학적인 조언을 한다.
"네 마음의 모양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 하지만 그건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이야."
그 뒤로 애벌레를 만났지만 애벌레는 스스로를 감싸는 고치를 통해 내면을 성찰해야 한다고 전한다. 벌과 해달 그리고 무덤가의 할머니까지, 길 위에서 만나는 존재들은 모두 '마음의 모양'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말한다. 그 말들은 명확한 해답이 되지 않지만, 질문을 조금씩 깊게 만든다. 집이란 결국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오래 바라보고 실패하며 알아가는 과정임을 일러준다.
작가는 이러한 만남을 통해 직설적으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들이 서서히 독자의 내면에 스며들도록 유도한다. 이 여정의 풍경은 때로 우화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울림을 남긴다.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집'이라는 테마를 내면의 은유로 확장한다.
그림의 언어, 감정의 질감
그림은 이야기와 한 몸처럼 호흡한다. 거칠고 어두운 톤의 배경 위에, 부드럽고 섬세한 색채의 장면이 자리한다. 낡은 집과 지붕, 숲과 바다 그리고 등장하는 존재들의 형상은 묘사와 더불어 감정의 질감을 드러낸다. 특히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공간의 색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을 포착해 낸다. 무덤가에서 만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집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때로는 내 마음을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알게 되기도 하지. 함께 울고 웃으며, 내가 걸어온 무수한 시간들을 지켜봐 준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마음의 모양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어쩌면 이미 만났을지도 몰라."
할머니의 말을 듣고 떠오른 건 소파 위에 두고 떠나온, 사람이었다. 집은 깨닫게 된다. 분노도, 쓸쓸함도, 외로움도 모두 함께 있던 집 속의 사람인 '너'에게로 향해 있다는 걸. 마음의 모양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은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마침내 서로에게 집이 된다는 건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돌아온 집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수도꼭지는 여전히 낡았고, 지붕은 새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공간을 채우는 공기는 분명 달라져 있다. 서로의 서운함을 말하고, 미처 꺼내지 못했던 마음을 나눈 뒤에야 집은 비로소 집이 된다.
한겨울 스웨터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집이란, 조건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마침내 서로에게 집이 된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마침내 자신이 찾던 마음의 모양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지금 머물고 있는 이곳은 정말 집인가, 아니면 단지 지나가는 공간인가. 그러나 이 집에서의 추억들은 나에게도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 준다. 함께 울고 웃으며 시간을 견뎌온 존재가 있다면, 그곳은 이미 집이라는 걸 나는 안다.
이 그림책을 읽고 나면 독자는 자연스레 자신의 집을, 곁에 있는 사람을, 그리고 말하지 못한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 오래된 집에 불이 하나 더 켜진 듯한 여운이 남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