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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1일,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꾸려가던 아들과 딸이 연말연시를 함께 보내기 위해 장수산골 집으로 모였다. 은퇴 이후 부부 둘만의 시간이 익숙해질 즈음, 이렇게 가족이 다시 모이는 자리는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바쁜 일정 속에서 어렵게 맞춘 1박 2일. 오고 가는 시간을 빼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사실상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가족 단체대화방은 분주해졌다. 무엇이 먹고 싶은지, 그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메시지가 오갔다. 딸은 홍어 삼합과 등갈비찜을, 아들은 '감바스 알 아히요'를 먹고 싶다고 했다.
류미큐브 게임도 좋고,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도 좋고, 짧은 시간 어딜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자는 의견도 나왔다. 메인 메뉴인 홍어삼합과 등갈비찜은 내가 준비하기로 했고, 딸은 감바스 알 아히요와 뱅쇼 재료를 챙겨 오겠다고 했다. 남편은 삼합에 곁들일 막걸리를 주문했다. 오랜만의 가족 모임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푸짐한 저녁 한상엄마는 홍어삼합, 갈비찜, 딸은 멀드와인, 아들은 감바스, 아빠는 해남막걸리를 준비했다 ⓒ 유상신
모이기 이틀 전, 늦은 저녁 시간에 딸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먹고 마시기만 하긴 아쉬우니까 미션 하나 할까요?"
딸은 35개의 질문이 담긴 질문지를 올렸다. 우연히 인스타그램 계정 '히스토핏'에서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질문지를 보았다며,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서로의 한 해를 묻고 답해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독립해 지내다 보니 가족이라 해도 서로의 마음과 시간을 자세히 알기 어려웠다. 각자 어떤 마음으로 한 해를 살아왔는지 말하고, 또 들어주는 시간이 의미 있을 것 같아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연말 저녁,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해졌다. 한쪽에서는 아들이 감바스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딸이 멀드 와인을 끓였다. 미리 준비해 둔 음식들과 아이들이 만든 요리가 상 위에 오르자 제법 푸짐한 한 상이 완성됐다.
온기로 가득찬 식탁

▲딸이 만든 멀드와인(뱅쇼)겨울철에 따뜻하게 마시기에 딱 좋다. ⓒ 이봄
맛있는 음식과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 그리고 이 시간이 모두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겹치며 식탁은 금세 온기로 가득 찼다.
식사를 마친 뒤, 딸의 진행으로 '한 해 돌아보기 질문 시간'이 시작됐다. 규칙은 간단했다. 35개의 질문을 참고하여 한 사람씩 돌아가며 질문 하나를 선택해 이야기하고, 나머지 가족은 각자 하나씩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공통 질문에 답하면 된다. 공통 질문은 '내년에 바라는 점'과 '오늘 이 자리한 줄 소감'이었다.
질문들은 생각보다 깊었다.
올해 가장 열심히 보낸 달은?
올해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올해 왜 그랬지 싶었던 흑역사는?
올해 나 스스로 대견했던 순간은?
올해 인간관계에서 배운 점 하나는?
새로 생긴 습관과 사라진 습관은? 등.
남편부터 시작해 차례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동안 서로 모르고 지나쳤던 마음들이 조심스럽게 드러났다. 혼자 버텨온 시간들, 자랑스럽고 대견했던 순간들,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나온 날들, 엉켰던 실타래를 차분히 풀어낸 이야기들...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그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곁에서 함께 살아가면서도 몰랐던 남편의 마음을 새삼 다시 들여다보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우리들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나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보다는, 각자의 말이 마음 속에서 한 번 더 머무는 시간이 필요했다. 평소라면 불쑥 튀어나올 법한 섣부른 질문 대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랬구나"라는 짧은 말이 조심스럽게 오갔다.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조심스럽게 건너가기 위한 다리처럼 느껴졌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한 가지 생각이 분명해졌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한 해를 살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짐작하고 넘겼던 시간들 속에, 각자의 싸움과 성장이 있었다. 마지막 마무리로 오늘 이 자리 한 줄 소감과 서로를 토닥이며 내년에 대한 바람을 나누자 새해를 맞이하는 기대와 응원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오갔다.

▲막걸리 ~ 한 잔남편은 제대로 빚은 막걸리를 멀리서 택배 주문했다 ⓒ 이봄
질문을 고르며 잠시 망설이던 모습, 말끝을 흐리다 끝내 웃음으로 넘기던 순간들,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야 한숨처럼 내쉬던 숨소리까지. 그날의 풍경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그냥 맛있는 음식을 먹고 웃고 떠드는 연말연시도 좋지만, 서로의 한 해를 물어주고 들어주는 시간은 가족을 다시 '공동체'로 묶어주었다. 앞으로도 매년 이런 시간을 갖기로 약속하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질문 몇 개가 가족의 시간을 이렇게 깊게 만들어줄 줄은, 시도해 보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성인이 된 딸, 아들이 독립하고 우리 부부 모두 은퇴한 뒤, 우리는 '따로 또 같이'의 의미를 다시 배우고 있다. 붙잡기보다 물어봐 주고, 앞서기보다 들어주는 방식으로.
어느 해보다 잘 정리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낀, 2025년의 마지막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