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6.03.24 13:22최종 업데이트 26.03.24 13:22

퇴직 4년차, 아직도 주말이 낯설다

집에 머무는 하루가 쉼이 아니라 공백으로 다가올 때

‘이종범의 은퇴이몽’은 퇴직 4년차로서 은퇴 전후의 현실을 기록합니다. 숫자만이 아니라 몸, 관계, 생활기술, 돌봄, 역할의 전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 봅니다.

주말 아침, 세면대 앞에 서서 면도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은 굳이…" 하는 마음이 올라온 탓이다. 그래도 씻고 면도는 해야지 싶지만, 이미 하루를 받아내는 마음 한쪽이 느슨해진 뒤다. 하루는 시작됐는데, 나는 아직 그 하루에 올라타지 못한 느낌이다. 퇴직 후 이런 아침을 자주 만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견 두 마리를 챙기고, 집 안팎을 정리한다. 연로하신 아버님 목욕을 도와드리는 일도 주말이면 빠지지 않는다. 오늘은 미뤄두었던 카펫까지 세탁해 널었다. 물에 젖은 카펫이 얼마나 무겁던지. 허리는 뻐근하고 손가락 마디도 욱신거린다. 몸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영 따라오지 않는다. 그럴 때의 주말은 묘하다. 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뭘 해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시간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주말이 바쁘면 바쁜 대로, 무료하면 무료한 대로 그냥 덩어리째 흘러가 버렸다. 그런데 요즘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순간들이 눈에 밟힌다.

AD
면도기를 들고 서 있다가 마음이 꺾이는 순간, 소파에 기대 리모컨만 이리저리 눌러보는 시간, 해야 할 일은 남았는데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 무기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장면들을 붙잡아 적다 보면 막연하던 헛헛함에도 윤곽이 생긴다. 아, 내가 지금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비어 있는 이유를 몰라 답답했던 거구나.

"마음도 들여다봐야 정리가 된다."

퇴고 카페에서 글쓰기를 마치고
퇴고카페에서 글쓰기를 마치고 ⓒ 이종범

퇴직 4년 차인 지금, 내게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다. 강의가 없는 평일, 습관처럼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목적은 커피 한 잔이 아니다. 씻고, 면도하고,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하루의 시동을 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펴는 순간,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집 안에 있을 때보다 덜 처지고, 덜 늘어진다. 누가 나를 불러낸 것도 아니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 기척이 오가는 공간에 내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서일까. 내겐 오히려 주말이 더 까다롭다. 평일의 집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나가는 공간이지만, 주말의 집은 아침부터 밤까지 온전히 내 힘으로 견뎌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집은 같은데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주중에는 바깥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있지만, 주말엔 그 연결이 뚝 끊긴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달콤한 휴식일 수 있겠지만, 내겐 자칫 너무 긴 정적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다.

물론 집에 머무는 게 싫은 건 아니다. 평일엔 밖으로 나가는 만큼, 주말에는 아내를 돕고 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막상 집에 있으면 내가 아직 집에서 시간 쓰는 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집안일은 끊임없이 생기지만, 그 일들이 내 하루의 중심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생활은 굴러가는데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이상한 상태가 남는다.

사람들은 퇴직하면 주말이 제일 좋지 않으냐고 말한다. 주중과 주말의 경계 없이 사는 것 자체가 자유 아니냐고도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퇴직 생활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많은 시간이 자유로 다가오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 시간이 그대로 고립의 무게가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조직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인해온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회사는 때로 갑갑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굴러가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일어나야 할 이유, 씻어야 할 이유, 약속 장소로 향해야 할 이유를 계속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직하고 나면 그 장치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제는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스스로 하루를 배열해야 한다. 해보면 안다. 생각보다 훨씬 품이 많이 든다.

내 사정도 다르지 않다. 마음은 작년보다 더 자주 강의실로 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강의 횟수가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쉬는 날이라고 마음까지 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더 만나야 하나, 강의 내용을 더 손봐야 하나, 이러다 점점 뒤로 밀리는 건 아닐까. 몸은 집에 있는데 머릿속은 하루 종일 분주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나면 쉬었다기보다는 공연히 마음만 더 소모한 것 같은 허탈함이 커진다.

퇴직한 사람의 일상을 흔드는 것이 꼭 돈만은 아니다. 통장 잔고 못지않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직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인지 확인할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별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편안함보다 자책이 먼저 밀려오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이 잦아질수록 나를 믿는 마음도 조금씩 약해진다.

그래서 퇴직 후 삶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같은 다짐만으로는 잘 버텨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저절로 움직이게 만드는 생활의 장치들이 더 필요하다. 씻게 만들고, 신발을 신게 만들고, 사람들 속으로 한 발 내딛게 만드는 반복 가능한 일정들 말이다.

그게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정해진 시간에 카페로 가는 일일 수도 있고, 작은 모임에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일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엔 일요일 저녁 합창 연습 같은 일정이 그렇다.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처져 있을 때도 그런 약속 하나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생각보다 그런 힘은 오래간다.

실제로 내가 보내는 주말은 쉼과 공백 사이를 오가는 시간에 가깝다. 그 사이에서 마음이 자꾸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려 한다. 면도기를 들었다 놓는 마음도,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한참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도, 퇴직 후 달라진 시간을 내 식대로 버텨보려는 과정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건 하루를 빈틈없이 채우는 일이 아니다. 비어 있는 시간 속에서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퇴직 후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정리되어 제자리를 잡지 않는다. 퇴직 4년 차인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도 주저앉지 않으려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주말 아침의 허전함도 조금씩 견딜 만한 시간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퇴직후일상#중년의삶#시간관리#관계와고립#제3의나이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재

이종범의 은퇴이몽

퇴직 이후 40년을 ‘어떻게 버틸까’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볼까’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듣고, 설명하고, 함께 고민해 온 이야기를 강의와 글로 천천히 풀어냅니다. 거창한 비법보다, 같이 버틸 수 있는 ‘노후해법’을 독자들과 함께 찾아가고 싶습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