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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30 15:05최종 업데이트 25.12.30 15:09

"추억 물씬... 1970~1980 광주 사직동물원 요모조모"

① 조선시대 사직단 자리에 들어선 광주 명소

 1971년 광주 사직동물원 개원식
1971년 광주 사직동물원 개원식 ⓒ 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1970~80년대 광주시민이라면 남녀노소 막론하고 대부분 사직동물원을 찾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광주에서 유일한 동물원이었으니까. 게다가 사직공원에는 봄이면 벚꽃이 활짝 피고 여름이면 수영장도 문을 열었으니, 이참저참 동물원도 들르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사직동물원은 1971년 4월 17일(토) 개원했다. 당시 주소는 서구 사동 177번지. 입장료는 개인은 어른 50원, 학생 20원, 어린이 10원, 단체는 어른 35원, 학생 15원, 어린이 5원이었다. 이튿날인 18일(일) 휴일을 맞아 사직공원에는 벚꽃놀이를 즐기려는 상춘객(賞春客) 10만여 명이 모였고 사직동물원에만 2만여 명이 몰렸다(참고로 1980년 광주시 인구는 85만명이었다). 당연히 일대 혼잡을 이뤘고, 미아(迷兒)만 25명이었다(한국동물원 80년사). 이처럼 시끌벅적하게 사직동물원의 역사는 막이 열렸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듯이 동물원에서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미스터리한 그런 사건들. 한때 18목 81종의 357마리 동물들이 6,300평의 좁은 구내에서 부대꼈으니 하루도 바람잘 날 없었을 것이다. 1972년 10월 '꽃사슴 녹용절단사건을 시작'으로 1978년 12월 '새끼 호랑이 전기 사형 사건' 등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그래서 사직동물원은 당시 광주시민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풍성한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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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이 만들어진 것은 반가웠겠지만, 문제는 위치 선정이었다. 1992년 3월 동물원이 우치공원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는 1960년대 말에 사라진 사직단(社稷壇)이 다시 지어졌다. 이게 무슨 뜻인가? 사직단을 헐고 동물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파트를 짓다가도 유적지가 나오면 즉시 공사를 중단해야 하는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때는 문화재를 대하는 우리의 수준이 딱 그 정도였다.

'사직단(社稷壇)'이란 무엇인가? '사직제(社稷祭)'를 드리는 제단이다. '사직제'는 또 무엇인가? 사극을 보면 가끔 나오는 대신들의 탄식,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위태롭구나" 할 때 그 '사직'이다. '종묘'는 조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니 '왕실'을 뜻한다. '사직'의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오곡의 신을 뜻한다. 한 해 농사에 앞서 지방관과 백성들이 함께 모여 풍년을 기원하며 '국토'와 '민생'의 안녕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사직제'다. 농사에 앞서 드리는 제사라고 해서 '선농제(先農祭)'로도 불렸으며, 제사가 끝나면 제물로 바친 소로 탕을 끓여 함께 나누어 먹은 '선농탕(先農湯)'에서 '설렁탕'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직단은 그런 곳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제는 1908년 전국의 사직제를 중단시켰고, 광주의 사직단 일대는 일본군의 훈련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24년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을 기념하여 사직공원을 조성했다. 이때 사직단 자리에 벚나무를 심고 산마루에 전망대를 세웠으며, 광주천에 금교(金橋)를 만들면서 광주공원에 이은 새로운 공원이라 해서 '신공원(新公園)'이라 불렸다. 사직제를 드리는 신성한 장소가 위락시설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사직제만 중단시켰을 뿐 사직단은 건드리지 않았다. 나라 잃은 백성을 괜시리 자극하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것을 허물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직단은 사라진 왕조(王朝)의 상징처럼 초라하게나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가끔은 나름의 쓰임새도 있었다. 1929년 여름 가뭄이 들자 하필이면 '8월 15일' 밤, 봉화가 환히 밝혀진 사직단에서는 10시부터 광주군 군수가 제주(祭主)가 되고 각 면장들이 제관(祭官)이 되어 기우제(祈雨祭)를 드렸다. 만약 효과가 없으면 다음은 증심사, 그 다음은 무등산에서 기우제를 지낼 예정이었다는데, 결과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사직단은 여전히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기에 일본인 군수와 조선인 면장들도 여기서 기우제를 드렸던 것이다.

 복원된 광주 사직단
복원된 광주 사직단 ⓒ 조대연

 1925년 5월 광주지역 유치원 원아들이 보모의 인솔로 사직단으로 소풍을 가서 그 위에 올라가 “춤추며 노래하고 종일토록 뛰놀았다"는 소식을 전하는 <소년동아일보> 1925년 5월 16일자 신문.
1925년 5월 광주지역 유치원 원아들이 보모의 인솔로 사직단으로 소풍을 가서 그 위에 올라가 “춤추며 노래하고 종일토록 뛰놀았다"는 소식을 전하는 <소년동아일보> 1925년 5월 16일자 신문.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하지만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25년 5월 어느 날, 광주유치원 원아들은 보모의 인솔로 사직단으로 소풍을 가서 그 위에 올라가 "춤추며 노래하고 종일토록 뛰놀"았단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무대치고 그만큼 멋진 문화재급 무대도 없었으리라.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 서울 외곽 서오능으로 소풍을 가면 의례 왕릉 위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거나 대굴대굴 구르며 내려왔던 필자는, 그 보모와 원아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다.

아무튼 그런 사직단을, 일제도 손대지 않았던 그 사직단을,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부순 것이다. 당시 신문을 보면 이를 우려하거나 비난하는 목소리는 찾을 수 없다. '개발'이 능사였던 그 시절, 사직단은 케케묵은 봉건왕조의 유물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어쩌면 당시 광주시민들에게는 사직단보다 동물원이 훨씬 반가운 시설이었을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장소, 바로 1960~80년대 창경원(昌慶苑)이다. 제법 큼직한 동물원이 있었고, 케이블카가 허공을 가로질렀으며, 대관람차가 웅장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벚꽃놀이 시즌이면 벚 반 사람 반이었을 정도로 북적였다.

이 창경원이,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가 황실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1909년 순종에게 '건의'하여 '황궁'인 창경궁(昌慶宮)'을 유원지인 '공원'으로 만들어 국민에게 개방했다는 사실은 대학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당시 중앙에는 박물관, 북쪽에는 식물원, 남쪽에는 동물원이 들어섰다. 1922년부터 벚꽃을 심고 봄에는 야간에도 개장했으며, 1924년에는 불꽃놀이도 열렸다. 역사와 규모를 놓고 보면 견줄 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사직동물원은 여러 가지로 창경원을 씁쓸하게 빼닮았다.

1970~80년대를 살았던 광주시민들의 앨범에는 사직동물원에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씩이 간직되어 있겠지만, 1997년에야 광주로 이사온 필자는 사진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당시 신문기사를 바탕으로 1970~80년대 사직동물원의 '요모조모'를 살펴보려 한다. 예상 출연진은 호랑이, 사자, 꽃사슴, 이족구(二足狗: 다리가 둘인 개), 삼족구(三足狗: 다리가 셋인 개), 재두루미, 오소리, 구렁이, 곰 등으로 조촐하게 시작한다(코끼리나 기린은 나오지 않는다. 없었으니까).

모쪼록 이 연재가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다. 혹시라도 당시 사직동물원에 얽힌 사연이나 사진을 보내주시면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 한다.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필자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hkm@gwangju.ac.kr
필자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hkm@gwangju.ac.kr ⓒ 한규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펭귄마을신문에도 실립니다.


#광주사직동물원#사직단#광주사직단#우치동물원#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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