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처분 된 돼지를 묻은 곳이다. ⓒ 화성시민신문
화성시민신문 12월 16일자 기사(
"닭이 아프면 아프지 않은 닭까지도 모두 죽여야 합니다")를 보고 가슴이 무척 쓰라렸다. 스위스에서 온 여성 농부 세레나님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랑했던 생명을 주검으로 맞이해야 하는 고통, 인간에 대한 배신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더 큰 고통으로 번져 그녀의 마음을 찢는 것 같았다.
힘들게 기사를 읽고 나니 15년 전의 기억. 그 끔찍했던, 그래서 묻어두고 잊으려 했던 기억과 느낌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젠 그걸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야만의 극치인 살처분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소리치기 위해서다.
2010년 12월, 크리스마스가 하루 지난 일요일. 소집령이 떨어졌다. 전쟁이 나서가 아니라 당시 전국을 휩쓸었던 구제역 때문에 살처분에 투입될 인원을 차출하는 명령이었다. 당시 공무원이었던 나는 부서당 한 명씩 차출하라는 명령에 우리 부서 1진으로 자원했다. 마침 출근한 데다 서로 눈치보며 우물쭈물하는 게 싫어서 내가 먼저 가겠다고 한 것이다.
살처분의 기억
당시 구제역이 뭔지, 살처분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집에 가서 옷 단단히 입고 다시 오라는 말에 안 입던 내복을 꺼내 입고 가장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걸쳤다. 그날은 무척 추웠다. 마스크와 장갑 등 마치 전투에 투입될 사람처럼 준비하고 밥을 잔뜩 먹었다. 축복받은 성탄절 시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했던 돼지 살처분 작전이 실행된 것이다.
시청에 도착하니 먼저 온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담배 피우는 무리에 끼어 살처분이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귀동냥을 해 보았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나같은 신세.
지휘자의 지시로 버스 두 대에 나눠 탔다. 누구 하나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저 앞사람 발길따라 차에 올랐다. 30여 분 지났나? "하차" 소리에 차에서 내리니 전원 방역복을 갈아입어야 한다며 컨테이너에 들어가 팬티만 빼고 옷을 모두 벗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추위에 약한 나는 달달 떨면서 옷을 벗었다. 컨테이너 안에는 내의와 재킷 등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방역복이 구비되어 있었다.
방역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지휘자가 앞으로 작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이탈할 수 없으며 이곳에도 올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촬영은 일체 허용되지 않으며 핸드폰을 절대 소지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받은 작업 지시는 엄청나게 커다란 비닐류 차수막을 역시 엄청나게 깊고 넓게 파낸 구덩이 바닥에 까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돼지 사체의 침출수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차단막을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수십명이 달라붙어야할 정도로 구덩이가 컸다. 돼지들이 이 구덩이에 매몰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고 약간의 몸서리가 쳐졌다.
차단막 작업이 끝나자 우리를 두 파트로 나눴다. 한 파트가 우리 안에 들어가 돼지들을 끌어내면 다른 파트는 밖에 나온 녀석들을 구덩이로 유인해 빠뜨리는 식이었다.
나는 돼지를 몰아본 경험은 커녕 우리 근처에 가본 적도 없었지만 차마 구덩이에 밀 자신이 없어 안에 들어가는 파트에 지원했다. 암모니아 냄새가 짙게 밴 가스 때문에 숨쉬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목장 관리자가 가르쳐준 대로 돼지 엉덩이를 회초리 같은 도구로 살살 치며 밖으로 유인했다. 나는 덩치 큰 돼지들이 그렇게 겁이 많고 순진한지 처음 알았다. 우리 안에는 수십개의 칸이 있었고 칸마다 여러 마리의 돼지들이 있었지만 나를 공격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피하느라 정신들을 못 차렸다.
교육 받은 대로 살살 달래며 밖으로 유인하는데 쉽지 않았다. 억지로 억지로 끌어내다시피 유인했다. 그런데 이 놈들은 순진하게도 반항 한 번 없었다. 이끄는 대로 끌려 나왔다. 작은 가지로 톡톡 치는 대로 밀려가는 돼지들의 행진을 보며 기가 찼다.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그 다음의 운명을 알기에.
우리 밖에 나온 돼지들은 이미 양 옆으로 유도선을 쳐놓았거나 사람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구덩이 앞에 다다른 녀석들은 그들 눈에 천길 낭떠러지로 보이는 입구 앞에서 멈춰섰다. 꽥꽥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그러나 바로 뒤에는 밀려온 무리가 밀어댔고 어쩔 수 없이 맨 앞줄부터 아래로 추락했다. 생매장이 시작된 것이다.
구덩이 앞에는 포크레인이 긴 팔을 들고 무섭게 서 있었다. 구덩이 입구가 혼잡(?)해지면 여지없이 팔을 흔들어 한꺼번에 밀어냈다. 그럴 때마다 여러 마리 돼지들이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앞에는 낭떠러지, 뒤에는 밀려오는 돼지떼, 위에는 포크레인에 갇힌 녀석들이 어쩔 수 없이 줄지어 구덩이 속으로 추락한 것이다. 어쩌다 거역하는 놈들에게는 잔인한 응징이 뒤따랐다.
척추가 부러지고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 화성시민신문
추락을 거부하는 돼지의 등을 수톤의 힘을 가진 포크레인 팔이 찍었다. 척추가 부러졌고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허리가 동강난 채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냥 떨어진 돼지들은 그나마 네 발로 서서 꿈틀거렸지만 허리가 부러진 놈들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돼지를 다른 놈이 밟고 벽을 긁어댔다. 자기 키보다 족히 열배가 넘는데도 쉴 새 없이 긁어댔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구덩이 바닥이 돼지들로 가득차면 다음엔 그들의 머리위로 흙이 뿌려졌다. 아비규환, 숨 한 번 쉬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등을 밟고 주둥이를 잔뜩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몸부림보다 포크레인 삽질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묻혔다.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우리 안에서 평화롭게 쉬고 있던 돼지들이...
똑같은 작업이 반복됐다. 돼지가 쌓이고 흙이 덮이고, 석회가 덮이고.... 나는 점점 무감각해져갔다. 그저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
밤을 꼬박 세워가며 작업했던 다음날 아침, 작업 위치 교대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구덩이 앞쪽에 배치됐다. 가장 하기 싫었던 자리다. 추락하는 돼지며 바닥이 너무 잘 보이고 포크레인은 바로 앞에 있다. 이제는 그저 돼지들이 거부하지 말고 순순히 빠져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 삽과 널빤지로 구덩이 입구 폭을 좁히는 작업을 했다. 돼지들이 옆으로 새다가 포크레인 공격을 받을까봐서였다. 그 덕에 처음엔 순조로웠다. 뒤에 오는 돼지들에 밀려 빠져나갈 틈 없이 차례로 추락했다. 똑같은 비명에 똑같은 발버둥. 점점 더 무감각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한 마리가 추락을 거부하며 튀어오르고 돌아서서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놀란 우리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여지 없이 포크레인 팔이 그 녀석의 등을 후려치고 척추가 부러지는 쩍 소리와 함께 하늘을 찌르는 비명이 터졌다. 바로 내 눈 앞에서...
미칠 것 같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들고 있던 유인용 작대기를 집어 던지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농장 담벼락에 기대앉아 이게 무슨 짓인가, 전쟁이라고 이것보다 더 잔인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10여 분을 그렇게 있다가 다시 위치로 복귀했다. 그런데 이번엔 포크레인 삽날에 배가 찍혀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 일부가 튀어나온 돼지가 구덩이 반대쪽을 내달렸다. 어떤 직원이 쇠봉으로 보이는 작대기로 머리를 내려쳤다. 나는 그 직원을 안다.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선한 눈을 가진, 행사 때 재미나게 사회 보던 친구였다. 우리는 그렇게 거기서 눈이 뒤집혀 있었다.
드디어 우리 안에 있던 돼지들을 모두 구덩이에 몰았다. 이제 끝났구나 했는데 아직 일이 남았다며 어떤 시설 앞에 두 줄로 서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미 출동한 지 스무시간 쯤 됐을 텐데. 지칠대로 지쳤고 빨리 끝나기만 소원했다.
그런데 마지막 작업은 어이없게도 새끼 돼지 살처분이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니 일주일이나 됐을까? 그런 아기돼지들을 두 줄로 서서 양 팔에 각각 한 마리씩 들고 구덩이에 빠뜨렸다. 당시 아기 돼지의 따뜻하고 여린 느낌을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 손이 기억한다. 동원된 인원 한 사람당 두세차례 쯤 작업(?)했던 것 같다.
작업 도중에 참이라며 컵라면이 나왔는데 바닥에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아 허겁지겁 먹었다. 야속하게도 하얀눈이 소복하게 내렸다. 바로 옆에는 구덩이에 빠진 돼지들이 빠져나오려고 소리를 지르며 긁어대고 있었다. 그래도 컵라면 먹는데 방해되지 않았다. 그 곳에서 나도 변해있었다.
투입된 지 서른 시간쯤 지났나? 작업을 마친 우리는 방역복을 갈아입었던 컨테이너에 돌아와 팬티만 빼고 모두 태웠다. 그렇게 첫 번째 살처분 작업이 끝났다. 하룻밤 사이 4천 마리가 넘는 돼지들이 매몰됐다.
집에 돌아와 아무 생각 없이 골아 떨어졌다. 집사람 말로는 내가 자면서 손을 이리저리 허우적대며 헛소리를 하더라고 했다. 왜 그러나며 말은 못 하겠고 꽤 공포스러웠던 것 같다.
집단 살처분, 집단 학살의 다른 이름
나는 이런 살처분 작업에 여섯 번 차출됐다. 나 뿐만 아니라 남성 공무원들 모두 같은 신세였다. 작업이 너무 잔인하고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 남성들만 차출됐다.
당시 전국의 공무원들이 똑같은 신세였을 것이다. 횟수만 달랐을 뿐. 동원될 때마다 조금씩 효율이 높아지고 방법도 개선되긴 했다. 그러나 구덩이에 산채로 매장하는 방식은 그대로였다.
당시 우리 지역의 돼지 2/3가 매몰됐다. 전국적으로도 2010년 1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약 3백만여 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됐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다.
구제역만이 아니었다. 조류독감도 번져 양계농가들을 습격했다. 조류독감이 유행병처럼 된 20여 년 동안 1억 2천만여 마리가 살처분됐다고 한다. 해마다 평균 5백만 마리의 닭과 오리들이 희생된 것이다.
집단 살처분은 동물을 대상으로 자행된 '제노사이드'의 다른 이름이다. 인류를 위해 우유와 계란을 내어주고, 끝내는 제 몸까지 내어주었건만 인간은 그들을 집단 학살했다. 닭을 살처분할 때 닭장 전체를 밀폐하고 가스를 넣어 질식사시킨다고 한다.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독가스실과 무엇이 다른가!
다행히 돼지와 소들에 대해서는 백신 정책으로 바뀌어 독감이나 코로나처럼 백신을 투입하고 발병 개체만 처리한다고 한다.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닭을 포함한 가금류들은 아직도 대량 살처분 정책 뿐이다. 이제 닭들에게도 마찬가지 정책이 도입돼야 한다. 하고자만 한다면 방법이야 없겠는가. 이제 정말 동물들을 집단 학살하는 일은 중단돼야 한다. 생명에 대한 존중감이 모든 일에 앞서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다. 그래야 진정 사람이다.
경기도민 임송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성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