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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일상이 된 시대, 새해 인사는 한결 가벼워졌다. 카카오톡 창을 열어 복사한 문장에 이모티콘을 얹어 '전송' 버튼만 누르면 그만이다. 받는 이의 얼굴을 깊이 떠올릴 필요도, 손의 온기를 실을 겨를도 없다. 인사는 손쉽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매끄러운 방식이 늘 탐탁지 않았다. 새해 인사만큼은 최소한의 '시간'과 '물성'이 깃들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深根遠香(심근원향)뿌리는 깊이 내리고 향기는 멀리 퍼지는 한 해 되소서. ⓒ 이명수
나는 20여 년 전부터 해마다 12월이 되면 연하장에 새길 글귀를 고심한다. 초등학생마저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던 시절, 출판사 편집 책임자였던 나는 휴대전화와 승용차, 카드가 없는 '3無'의 삶을 살았다.
연락이 끊기는 불편보다 생각이 단절되는 불안이 더 크게 다가왔던, 이른바 '자발적 불편'을 기꺼이 실천하던 현대판 원시인이었다. 그때 나에게 연하장은 세상과 연결되는 가장 정중한 통로였다.
문장은 곧 책임, 1년을 함께할 글귀들
연하장은 참으로 기이한 기록이다. 일기처럼 지극히 사적인 것도 아니고, 계약서처럼 오롯이 공적인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상대를 향해 정성을 다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에게 보내는 한 해의 굳건한 다짐이기도 하다.
출판 편집자로 살아온 40년 세월 동안 문장은 늘 나에게 '책임'이었다. 한 문장이 때론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때론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낳기도 하는 현장을 숱하게 목도해 왔다. 하여 나의 연하장은 가볍게 읽고 스쳐 지나가는 인사가 아니라, 받는 이의 곁에서 1년을 의연히 버텨낼 문장이어야 했다.
나는 해마다 20여 개의 문구를 손수 짓는다. 한자 네 글자를 쓰고, 그 뜻을 한글로 간결하게 풀어 적는 방식이다. 창작자로서 틀에 박힌 것을 경계하기에 매년 새로운 문구를 골라내는 작업에 가장 많은 공력을 기울인다. 올해도 나를 다스리고 타인을 축복할 문장들을 길어 올렸다.
深根遠香(심근원향): 뿌리는 깊이 내리고 향기는 멀리 퍼지는 한 해 되소서.
思惟開花(사유개화): 깊은 사유가 꽃피어 삶에 향기를 더하는 한 해 되소서.
破竹之勢(파죽지세): 막혔던 길이 시원스레 열리는 한 해 되소서.

▲思惟開花(사유개화)깊은 사유가 꽃피어 삶에 향기를 더하는 한 해 되소서. ⓒ 이명수
서울에서 구청장으로 봉직하는 초등학교 동창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른 문구는 '一念開天(일념개천)'이다. 지극한 한 생각이 막힌 세상을 활짝 여는 한 해가 되라는 염원을 담았다. 이 글귀들은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덕담이 되고, 나에게는 그해를 따라 걸어야 할 견고한 좌우명이 된다.
비효율의 정성이 엮어내는 관계의 지속 가능성

▲破竹之勢(파죽지세)막혔던 길이 시원스레 열리는 한 해 되소서. ⓒ 이명수
신기하게도 이 느린 연하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출판사 대표님은 나의 연하장을 버리지 않고 10년 넘게 사무실 벽에 차곡차곡 붙여 두셨고, 정기 검진을 받는 병원 대기실에는 내 글씨가 액자에 고이 걸려 있다. 처음엔 다소 쑥스러웠으나 이제는 묘한 책임감을 느낀다.
편집이란 결국 세상의 수많은 문장 중 가장 빛나는 것을 골라 독자에게 전하는 일이다. 연하장을 쓰는 행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내 인생이라는 한 권의 책, 그 한 페이지를 정성껏 편집하여 소중한 이들에게 선물하는 일이다. 디지털 텍스트가 복사하고 붙여넣으며 무한 복제될 때, 손글씨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획 하나하나에 그날의 기운과 감정이 고스란히 실리는 것이다.
카톡 메시지는 찰나에 전송되지만, 붓글씨 연하장에는 문구를 고르는 시간, 먹을 가는 시간, 글씨를 말리고 낙관을 찍는 시간, 편지봉투에 주소를 적어 우체국까지 걸어가는 '비효율적인 정성'이 오롯이 담긴다. 그러나 나는 그 비효율이야말로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지탱한다고 굳게 믿는다.
여수에서 갓김치를 보내주시는 교수님, 과일 상자를 들고 찾아오는 친구, 애주가인 나를 위해 술 한 병을 들고 오시는 이들까지. 그분들은 내가 들인 비효율의 무게를 더없이 귀하게 헤아려 주신다.
즐거운 불편을 멈추지 않는 이유

▲一念開天(일념개천)지극한 한 생각이 막힌 세상을 여는 한 해 되소서. ⓒ 이명수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면서 재택근무를 해야 했기에, 나도 오랜 고집을 꺾고 결국 휴대전화를 만들었다. 확실히 편리하고 유용하다. 하지만 12월이 되면 나는 변함없이 지필묵을 준비한다.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가는 과정은 하나의 의식과 같다. 검은 먹물이 은은한 향을 내뿜으며 갈릴 때, 지난 한 해의 소란함이 비로소 고요히 가라앉는다. 요즘 젊은 세대가 디지털의 피로 속에서 레트로한 감성이나 '진짜 물성'을 지닌 것들에 열광하는 것도, 어쩌면 나처럼 이런 '온기'를 찾아 헤매는 몸부림이 아닐까.
내게 연하장은 40년 편집자 인생에서 가장 짧지만, 가장 사적인 편집이다. 말은 빠를수록 가벼워지고, 진심은 손끝을 거쳐야 더욱 깊어진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 놓인 내 연하장이 그 사람의 새해를 아주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즐거운 불편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