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은퇴 후, 함께이되 각자의 속도로 걷는 부부의 기록을 시작합니다. 걷기와 책읽기, 일상에서 발견한 ‘따로 또 같이’의 삶을 전합니다.
감기 기운이 길게 이어졌다. 며칠째 기침이 멈추지 않자, 몸뿐 아니라 마음도 함께 처져갔다. 이럴 땐 약보다 먼저 땀을 빼야 한다는, 나만의 근거 없는 확신이 생긴다.

"여보, 오늘은 암마이봉 한 번 올라가요. 땀을 한 번 쭉 빼면 좀 힘이 날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겠냐"라고 묻던 남편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나갈 채비를 하였다.

AD
마이산은 두 개의 봉우리가 말의 귀처럼 마주 서 있다.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그중 오를 수 있는 건 암마이봉이다.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출발해 암마이봉 등산 입구인 천왕문을 향해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마이산 탑사가 나온다.

시멘트 한 줌 없이 쌓아 올린 돌탑들. 수십 년을 바람과 비에 내맡긴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은 볼 때마다 항상 경이롭다. 돌탑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 탑들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바람과 비를 잘 피해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흔들림을 견뎌내며 더욱 단단히 중심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산 탑사 언제봐도 경이롭다
마이산 탑사언제봐도 경이롭다 ⓒ 유상신

'이 돌탑들이 수많은 세월을 비바람에 버텨왔듯, 오늘은 힘들어도 나도 한번 제대로 버텨보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탑사에서 다시 조금 더 올라가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은수사가 나온다. 그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640살 먹은 청실배나무가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마이산을 찾아 기도를 마친 뒤 증표로 심은 씨앗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다. 마침 여기저기 떨어진 배가 눈에 띄어 하나를 주워 베어 물었다. 싱그러운 향이 퍼지며 들큰한 맛이 느껴졌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법고 앞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북을 치며 소원을 빌 수 있다. 여기 올 때마다 늘 그렇듯 남편은 큰 법고 앞에 서더니 둥, 둥, 둥 세 번 북을 울린다. 나도 자동적으로 북소리에 맞춰 두 손을 모으고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행복하라'는 기원과 함께 세 번 허리 숙여 절한다.

은수사 법고 이 북을 세 번 두드리면서 소원을 빌 수 있다
은수사 법고이 북을 세 번 두드리면서 소원을 빌 수 있다 ⓒ 유상신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행복하라.'

법정 스님이 쓰신 책 속의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이직을 준비하느라 애쓰는 아들과 직장생활로 늘 동동거리며 지내는 딸, 홀로 지내시는 양가 부모님, 큰 욕심 없이 지금처럼 살고 싶은 우리 부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위한 기원이 들어 있다.

최근 막 읽기 시작한 책, <편안함의 습격>에서 저자는 말한다.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완전한 안락이 아니라 의미 있는 불편함이라고. 나의 기원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 삶이 전혀 힘들지 않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잘 이겨내어 저마다 자신의 생명을 마음껏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은수사 옆을 돌아 324개의 계단을 오르면 암·수마이봉 사이의 고갯마루, 천왕문에 이른다. 이곳에서 암마이봉의 진짜 오르막이 시작된다. 평소 '따로 또 같이'를 외치는 부부답게, 등산 초입에서 남편에게 나는 내 속도에 맞게 올라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올라가시라고 했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앞서 걷는 남편 뒤를 따라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다.

70도가 훌쩍 넘어 보이는 경사에 철계단과 암릉이 번갈아 이어졌다. 보통 때였더라면 이 정도의 등산쯤이야 큰 무리는 없었겠지만 감기로 약해진 몸은 금세 신호를 보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다리는 힘이 풀려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그만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곧 정상이라 생각하고 한걸음만 더 내딛자며 발걸음을 붙잡았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지만, 딱 한 발만, 딱 한 계단만 하며 내딛다 보니, 어느 순간 암마이봉 정상 표지석 앞이다.

암마이봉 정상 표지석 '한걸음만 더' 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
암마이봉 정상 표지석'한걸음만 더' 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 ⓒ 유상신

몸은 힘들었지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표지석 앞에 서니, 뿌듯함과 안도가 마음을 가볍게 했다. 이내 내려가는 길은 발걸음이 춤을 춘다. 다시 암·수마이봉 사이의 고갯마루 천왕문으로 내려와서 북부 주차장을 향해 508개의 계단을 내려간다. 그 아래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호수뷰의 식당 겸 카페가 있다. 거기서 점심을 먹고 한나절 책을 읽다가 되돌아가려고 한다.

카페에서 책읽기 아내(편안함의 습격/마이클 이스터), 남편(혁명가 붓다/법륜)
카페에서 책읽기아내(편안함의 습격/마이클 이스터), 남편(혁명가 붓다/법륜) ⓒ 유상신

남편이 펼쳐 든 책은 법륜 스님의 <혁명가 붓다>, 내가 펼친 책은 마이클 이스터의 <편안함의 습격>.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이다.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치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이 1부. 타이틀 문장이다. 이미 보았던 문장이건만 조금 전 암마이봉을 오를 때의 고통과 뿌듯함이 책 속의 문장과 오버랩되면서 처음 만난 문장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아주 힘들어야 한다. 그러나 죽지 않아야 한다." 저자는 이 문장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는 정확한 경계선을 말한다. 너무 편하면 무너지고, 지나치게 힘들면 부서진다. 그러니 딱 그 사이,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을 만큼 최대한 가 보라고.

감기를 떨치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암마이봉을 오른 것은 10월 21일이었다. 두 달이 훌쩍 지난 지금, 한 해의 끝에 서서 다시 돌아보니 그날의 가파른 계단과 숨 고르던 순간이 여전히 또렷하다. 그날 나는 <편안함의 습격>의 한 문장을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몸으로 읽었다. 아주 힘들어야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

살다 보면 또 다시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수시로 찾아오겠지만, 그때마다 암마이봉의 기억이 딱 한 걸음만 더 내디딜 용기를 건네줄 것 같다.

한 해의 끝에서, 그리고 새해를 앞두고 이 말을 당신에게도 건네고 싶다.
오늘 당신이 넘겨야 할 삶의 경사 앞에서, 숨 한 번 고르고 다시 한 발 내디뎌 보기를 응원한다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마이산#암마이봉#편안함의습격#마이클이스터#감기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재

은퇴부부의 '따로 또 같이'

자연과 책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은퇴 후 나의 하루는 내가 디자인하며 삽니다. 지금 여기에 사는 즐거움(기쁨이자 슬픔)을 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독자의견3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