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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31 17:38최종 업데이트 25.12.31 17:38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습니다

[시로 읽는 오늘] 김일영 '뽀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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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뽀드득
- 김일영

지난날들을 모두 지우고
그 백지 위에 써보고 싶다
내일 걸어가야 할 눈 위의 발자국에 대해
방바닥에 차오르고 있는 온기에 대해
아궁이에서 잠든 고양이와
고양이가 다시는 입맛에 대해
밤이 깊도록 오고 있는 엄마에 대해
어제 태어난 강아지 털의 감촉에 대해
방금 깎은 몽당연필 심에 침을 발라
새기듯 써보고 싶다
허공을 걸어두고 겨울을 향해 걸어가는
나무들의 맨발에 대해
처음 편지를 쓰던 그 밤을 찍어 바르고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훔쳐보며 두근거리던
그 심장 소리를 따라가 보고 싶다
가다 보면 눈물 자국이 볼을 빨갛게 얼려도 좋아
백지는 어차피 눈이 쌓인 들판
내가 지나온 발자국마다 다시
아침처럼 차오르는 새하얀 침묵
아무도 없는 그 백지 위를
뽀드득 세 글자로만 걸어가고 싶다

출처_시집 <토닥토닥 두근두근>, 삶창, 2025
시인_김일영 :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토닥토닥 두근두근>이 있다.

 새해, 백지 위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새해, 백지 위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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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동안 우리가 남긴 발자국들은 대개 비틀거렸거나 진흙탕을 지나온 것들이어서, 새해가 오면 우리는 서둘러 그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소망은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문턱에서 지난날을 '백지'로 되돌리려는 의식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백지 위에 다시 새기고 싶은 것들은 결코 거창한 결심이 아닙니다. 방바닥의 온기, 아궁이 옆의 고양이, 밤늦게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발소리처럼 작고 낮은 것들입니다. 이 소박한 생의 감각들이 실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온 뼈대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습니다. 새해의 첫 아침, 아무도 없는 그 깨끗한 시간 위를 오직 '뽀드득', 그 투명한 소리 세 글자로만 걸어가고 싶은 마음. 당신의 새해도 그렇게 맑은소리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정은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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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시인#뽀드득#토닥토닥두근두근#한국작가회의#시분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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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로 읽는 오늘

(사)한국작가회의는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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