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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22 10:51최종 업데이트 25.12.22 10:51

제주에서 느낀 크리스마스의 향기

제주국제컨벤션센터 크리스마스 마켓, 체험부스 체험... 아이와 함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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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크리스마스는 육지에서 떠올리는 연말의 풍경과는 조금 다르다. 거리마다 트리가 늘어서고, 밤이 깊어질수록 불빛이 더해지는 대신, 이 섬의 겨울은 여전히 바람이 먼저다. 크리스마스는 제주에서 종종 연말의 여러 날 중 하루처럼 지나간다.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제주에서 살아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섬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난히 담담하게 느껴지는 건, 오랫동안 다른 방식으로 신을 맞이해 온 시간의 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크리스마스

제주에는 설문대할망이라는 존재가 있다. 한라산을 만들고 오름을 빚었다는 어머니 신. 이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라기보다, 신이 어디서 왔고 어떤 삶을 거쳐 이 땅을 돌보게 되었는지를 풀어 전해온 서사에 가깝다. 제주의 사람들은 신을 부르기 전에 먼저 그 이야기를 기억해 왔다. 이름보다 사연을, 기적보다 시간을 먼저 꺼내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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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주에서는 오랫동안 마을신과 조상, 바다와 바람 같은 자연에게 비는 의례가 삶의 리듬을 만들었다. 바다에 나가기 전 마음을 다잡는 시간, 마을제를 통해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던 날들. 이곳에서 '신을 모시는 날'의 감각은 크리스마스보다 정월이나 마을제, 굿이 열리는 시기에 더 짙게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가 이 섬에서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런 제주에서도, 이맘때가 되면 크리스마스를 닮은 장면들이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시간 위에 잠시 다른 계절의 온기가 겹쳐지는 순간들이다.

제주에서 드물게 마주한 크리스마스 장면 아이 키보다 큰 크리스마스 장식 앞에서 잠시 멈춘 순간
제주에서 드물게 마주한 크리스마스 장면아이 키보다 큰 크리스마스 장식 앞에서 잠시 멈춘 순간 ⓒ 이현숙

크리스마스의 향기를 기억나게 해주는 행사가 지난 14일 일요일에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되었다. 3층 로비에 들어서자 크리스마스 마켓과 체험부스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캐럴이 흐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겹쳤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사람들의 속도였다. 서두르지 않고, 머무는 얼굴들이 많았다.

제주에는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풍경이 따로 없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잠시라도 크리스마스를 닮은 장면이 펼쳐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머문다. 크리스마스를 크게 믿지 않아도, 깊이 알지 않아도, 잠시 그 분위기 안에 있어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아이와 함께 선택한 체험은 트리 램프 만들기였다. 아크릴판 위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한 뒤 불을 켜는 단순한 작업이다. 원하는 그림을 그려도 됐지만, 여섯 살 아이는 망설임 없이 트리를 그렸다.

남쪽의 겨울에서 만나는 크리스마스의 풍경

우리 집에는 올해 크리스마스 트리가 없다. 최근 몇 해 동안은 크리스마스를 의식해 트리를 준비했지만,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따뜻한 날씨 때문이기도 했고, 크리스마스보다 더 큰 집안 행사가 앞에 있었던 탓도 있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크리스마스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작은 아크릴 안에 트리를 그리고, 그 위에 불을 켰다. 삐뚤고 고르지 않은 그림이었지만, 아이는 한참을 들여다봤다.

"코 자는 방에 가져가서 켜 둘래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접혔다. 제주에서 크리스마스를 산다는 건, 이렇게 작은 방식으로 계절을 보충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타 복장을 한 직원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있었다. 우리 집의 세 살 꼬마도 사탕 하나를 받았다. 그런데 그 사탕을 먹지 않았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지금 안 먹을 거야?"

아이는 대답 대신 사탕을 더 꽉 잡았다. 아마 중요한 건 사탕의 맛이 아니라, 받았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먹어버리면 사라질까 봐, 그래서 잠시 더 손에 남겨두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섬에서 크리스마스가 종종 심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붙잡지 않으면 금세 지나가 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펼치고, 마음이 쉬어가던 테이블. 아이와 어른이 각자의 속도로 머물 수 있었던 시간.
그림을 그리고, 책을 펼치고, 마음이 쉬어가던 테이블.아이와 어른이 각자의 속도로 머물 수 있었던 시간. ⓒ 이현숙

책이 쉬는 자리

이날 더 오래 머물게 된 건, 같은 공간에서 책과 관련된 자리들이 함께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험부스 사이로 책과 그림, 작은 출판물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 옆에서, 책은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래 머문 곳은 '그리다 제주' 부스였다. 따뜻한 제주 노을을 배경으로 한 엽서와 작품들이 놓여 있었는데, 색감은 온기 있었지만 그림에는 묘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관광지의 밝은 제주가 아니라, 혼자 걷는 저녁의 제주를 닮은 그림들이었다.

제주의 작은 책방에서 출판을 이어가는 이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섬의 이야기를, 이 섬의 속도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북케이션 공간 한편에는 책을 읽고 글을 적어볼 수 있는 긴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아이가 옆에서 쉬는 동안, 나도 잠시 그 자리에 앉았다. 꼭 무엇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지금의 순간을 마음에 남겨도 괜찮은 자리였다.

제주 북케이션과 연말 풍경이 조용히 겹쳐지던 자리. 책이 놓인 벽과 크리스마스 트리의 책 모양 오너먼트가 어울어진 공간. 이곳의 주인공은 책이다.
제주 북케이션과 연말 풍경이 조용히 겹쳐지던 자리.책이 놓인 벽과 크리스마스 트리의 책 모양 오너먼트가 어울어진 공간. 이곳의 주인공은 책이다. ⓒ 이현숙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트리 램프를 품에 안고 있었다. 둘째는 여전히 사탕을 손에 쥔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거창한 장식이나 대표적인 행사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없는 트리를 그려 불을 켜고, 먹지 않은 사탕을 손에 쥐고 하루를 붙잡고,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에서 잠시 멈춰 서는 일. 제주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제주에는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풍경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크리스마스를 살아내는 방법은 더 많다. 조용하지만 비어 있지는 않은 겨울을 또 마주한다. 그 온도는 그렇게, 이 섬의 크리스마스로 남는다.

#제주살이#제주크리스마스#제주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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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이주해 두 아이를 키우며 삶을 기록하는 엄마입니다. 도시 부모들의 로망과 현실, 육아와 배움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생활 속에서 찾은 진짜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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