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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3월 26일 범종추 주도로 서울 조계사에서 '종단 개혁을 위한 구종법회'가 시작된 뒤 29일 총무원 측이 동원한 인력과 공권력이 난입해 이른바 '3.29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1994년 3월 26일 범종추 주도로 서울 조계사에서 '종단 개혁을 위한 구종법회'가 시작된 뒤 29일 총무원 측이 동원한 인력과 공권력이 난입해 이른바 '3.29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 운판

효림 스님의 삶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다. 출가는 우연에 가까웠고, 수행은 산중보다 거리와 감옥에서 더 깊어졌다. 그는 종교인이었지만 종교 안에 머무르지 않았고, 수행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 수 없다고 믿어왔다. 정치와 거리를 두려 했으나, 시대의 폭력과 사회의 균열은 그를 끝내 비켜서게 두지 않았다.

1968년 계를 받고 운수행각(구름처럼 물처럼 정해진 곳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것)을 시작한 그는 유신체제 아래에서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몸으로 겪었다. 이어 5·18과 10·27 법난, 탈영과 은신, 감옥 생활을 거쳐 1994년 종단 개혁에 이르기까지, 그의 수행은 자연스럽게 사회로 확장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과정에 시민사회 인사들과 함께 참여했고, 이후 성남에서 이재명의 성남시장 도전 과정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정치 참여는 목표라기보다 결과에 가까웠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이 권력을 대하는 태도, 제도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방식에 있었다.

지난 8일 시인이자 수행자 그리고 종단 개혁의 실무 책임자였던 효림 스님에게서 출가와 행각, 감옥의 시간을 들었다.

고무신 신고 따라간 여름... 출가는 결심이 아니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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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는 어떻게 하시게 됐습니까?

"많은 경우에는 도를 닦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발동해서 출가를 하잖아요. 나는 아니었어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선배가 '무주구천동 백련사 한번 가보자'고 해서, 그냥 고무신 하나 신고 따라나선 게 시작이었습니다.

6·25 때 절이 다 불타고, 임시 가건물에서 혼자 살고 계신 노스님이 좌선을 하고 계시길래 '뭐 하십니까?' 여쭸더니 '도를 닦는다, 나를 찾는 일이다'라고 하셨어요. '내가 나를 찾는다'는 말이 중학생 귀에 아주 강하게 꽂혔지요. '이게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편지를 보냈어요. '1년만 여기서 나를 찾아 깨닫고 돌아가겠다'고. 집에서는 뜬금없는 편지를 받고 놀랐겠지요. 그래도 결국 쌀 두 가마를 팔아 6천 원을 보내주면서, 절반은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으라고, 절반은 스님께 올리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내 출가의 시작이었습니다."

- 행자 생활과 수계의 경로는 어떻게 이어졌습니까?

"가을이 되자 스님이 '큰 절에 가서 계를 받아야 한다'라고 하셨어요. 해인사로 갈까, 금산사로 갈까 하다가 조계사를 택했습니다. 계는 소천 스님이 계신 인천 보각사에서 받았어요. 조계사에 있으면서 여러 큰스님 법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소천 스님 법문이 유난히 깊게 와닿았습니다.

이후에는 범어사 강원에서 교학 공부를 했고, 1972년부터는 전국 선방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당시 '운수납자'는 말 그대로 구름처럼 떠도는 수행승이었어요. 절마다 행각하며 잠시 머물다 또 다음 절로 옮겨가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였고,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절 밖의 수행... 거리·노동·행각에서 배운 불교

- 운수행각에서 어떤 경험을 하셨고, 수행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어느 날은 봉암사에서 길을 나섰습니다. 문경, 예천, 안동을 지나 단양 죽령을 넘고, 제천과 원주를 거쳐 결국 서울까지 걸어간 적이 있어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길이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다리 밑에서 자기도 하고, 화전민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고, 작은 절에서 며칠씩 몸을 추스르기도 했지요. 그 시간이 다 내게는 수행이었습니다.

스님 신분을 숨기지 않고 공장에 나가 일하고, 시멘트 블록 만드는 현장에도 서 보고, 구두닦이도 하고, 목장에 가서 새벽부터 밤까지 젖소를 돌보기도 했습니다. 찬물에 손을 담그고 소젖을 짜면서, 하루 품삯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삶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몸이 고단한데도 마음을 놓지 않는 것, 세속 한복판에서도 내가 승려로서 중심을 지킬 수 있는지가, 그때는 수행의 기준처럼 느껴졌습니다."

- 국가권력과 개인의 삶이 충돌하던 시기였습니다. 수행자에게도 영향이 있었습니까?

"1970년대 후반 제주 서귀포 인근 황림사(현 봉림사)에 머물 때 불교청년회의 요청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인원이 100명을 넘자 빵모자를 쓴 40대 남성이 찾아와 '중앙정보부'라고 밝히며 강의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잠깐 얘기한다면서 40분 가까이 청년법회 자리에서 반공·시국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국가권력이 종교와 청년 모임에까지 개입하던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이미 병무검사에서 제2보충역 판정을 받았는데, 그즈음 갑자기 현역 입영 영장이 나왔고 주소도 모르는 사이 제주 관음사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병무청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스물아홉에 입대했습니다. 군 생활 중 탈영을 결심해 육지로 건너와 사찰과 토굴을 옮겨 다니며 숨어 지냈습니다."

- 1980년에 광주 5·18과 10·27 법난이 일어납니다. 그 폭력과 공포가 이후 삶에 남긴 흔적은?

"논산 관촉사 근처에 있을 때, 중앙대 문창과 출신 적음 스님이 운동권 지인들을 통해 광주 소식을 전해줬어요. 이후 광주에 다녀온 이로부터 '수천 명이 죽었다'는 참혹한 이야기도 들었고요. 얼마 있다가 군사정권이 조계종을 강제로 짓밟은 10·27 법난이 벌어졌고, 아무 관련도 없는 관촉사 주지 스님이 보안사에 끌려가 구타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불교 전체가 짓눌리고 있다는 느낌이 생생했습니다. '잡히면 그냥 끝이다'라는 공포가 따라다녔습니다. 3년 가까이 숨어 지내며 큰 절은 피하고 논산 주변 작은 토굴에서 은둔하다가 1983년에 자수해 안양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감옥이라는 도량... 무기수와 마르크스를 만나다

- 감옥이라는 극한의 조건은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산중에서 경전 읽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을 감옥에서 알게 됐지요. 그곳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 자체가 교재였습니다. 스님이라는 신분도, 밖에서의 경력도 의미가 없었고, 모두가 같은 조건 속에 놓여 있었죠. 그 평등한 조건 속에서 인간을 가장 날것으로 보게 됐습니다.

월남 파병 이후 무기수가 된 한 재소자는 제 공부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를 스스로 익혀 경전을 읽고, 하루를 철저히 관리하며 살았습니다. 자유가 없는 공간에서도 삶을 선택하는 태도를 보며, 수행은 환경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걸 배웠습니다. 사형수와 장기수, 이름 없는 재소자들을 만나며 선악을 쉽게 나눌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저는 판단하기보다 듣고 지켜보는 법을 익혔습니다.

또 실존주의와 마르크스 사상을 접하며 인간과 사회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극한 조건 속에서도 어떤 선택이 가능한지,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적 억압이 무엇인지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옥은 불교가 인간과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깨닫게 한 도량이었죠."

- 출소 이후의 독서와 만남이 수행과 사회 인식을 어떻게 확장시켰는지요?

"약 1년 형기를 마치고 1984년쯤 출소한 뒤 성남 원정적사에 머물며 사회과학·현대사 관련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감옥에서 다짐한 대로 불교 경전뿐 아니라 사회과학서, 사상서, 금서 취급을 받던 북한 관련 서적까지 폭넓게 접했습니다. 분단, 이데올로기, 국가폭력에 대한 시야를 넓혀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성남 봉국사는 군대 가기 전부터 드나들던 도량이었고, 출소 후 원정적사에 3~4년 머물며 운동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됐습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목이 잘 안 돌아갈 정도였던 시기입니다."

- 도심 도량에서 '책과 사람'으로 공부하던 시기의 핵심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원정적사는 수행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 노동단체, 전교조, 운동권 인사들이 와서 머물거나 피신했고, 1987년 6월항쟁 즈음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사람들이 드나들며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동국대 다니는 스님들도 수련 차원에서 와서, 그들에게 불교와 사회, 한용운, 불교 사회주의 같은 내용을 강의했습니다. 산중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 작은 도량에서 책과 사람을 통해 한국 사회를 다시 공부하던 시기였습니다."

- '실천불교'의 씨앗은 어디서 나왔나요?

"당시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으면서 자본주의의 모순 문제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허용하는 체제인데, 불교에서는 탐욕을 도의 가장 큰 장애로 봅니다. 이 전혀 다른 두 사상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불교가 현대 사회의 철학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젊은 스님들에게 만해 한용운이 스스로 '불교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한 사람이라는 점을 말하며, 불교가 사회 현실과 분리된 종교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경험이 나중에 말하는 '실천불교'의 사상적 바탕이었던 셈입니다."

 1994년 3월 23일 범승가종단 개혁추진위원회 출범식.
1994년 3월 23일 범승가종단 개혁추진위원회 출범식. ⓒ 효림

- 1994년 종단 개혁으로 이어지기 전, 불교계 내부의 흐름은 어떠했고 스님은 그 흐름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5·18 때 희생당한 스님도 여럿 있을 정도로 불교계 안에도 운동권이 형성돼 있었습니다. 내가 탈영병으로 숨어 다니고 감옥을 살던 시기, 가까운 도반인 종태 스님, 명진 스님 등은 이미 본격적인 불교 운동에 들어가 있었고, 여익구씨도 민중불교를 내세워 활동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도반이었던 종태 스님과, 현응 스님, 명진 스님 등이 대승불교전국승가회를 만들 때 참여했고, 이후 민중불교의 정토회와 활동이 겹치며 1993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가 출범했습니다.

실천승가회에서 나는 종단 개혁을 전담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범종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책임(집행위원장)을 맡은 것이 40대 초반이었습니다. 내부에서는 '종단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회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실무를 맡은 젊은 스님들이 동의해 준 덕분에 1994년 종단 개혁을 실제로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말하기 전에, 종단 내부를 먼저 바로 세워야 한다고 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불교 내부가 먼저 개혁되지 않으면, 결국 불교는 언제든 외부 권력과 사회적 압력 앞에서 흔들릴 수 있다고 봤습니다. 종단의 권력 구조와 재정, 인사 문제부터 바로 세워야 외부 권력 앞에서도 자율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문제 의식의 출발점은 1954년 불교 정화 운동이었습니다. 정화 운동은 흔히 비구와 대처의 갈등으로 설명되지만, 본질은 달랐습니다. 핵심은 대처 승려 자체가 아니라, 일제와 결합한 친일 기득권 구조를 불교 내부에서 청산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래서 초기 구호도 '왜색 불교를 몰아내자'였고, 이는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조계종은 한국 사회 전체가 제대로 하지 못한 일제 잔재 청산을 종단 내부에서 일정 부분 이뤄낸 드문 사례라고 봅니다. 다만 정화 운동은 성과만 남기지 않았습니다. 해방 전후 사찰 재산과 적산 문제를 둘러싸고 불교 재산이 유실·전용되는 과정에서 큰 손실도 남겼습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쌓이며, '내부 질서를 스스로 세우지 못하면 언제든 외부 권력에 다시 휘둘린다'는 문제 의식이 생겼고, 그것이 훗날 종단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1994년 3월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과 제도 개혁을 요구했다. 왼쪽부터 법안·효림·지선·청화 스님.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1994년 3월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과 제도 개혁을 요구했다. 왼쪽부터 법안·효림·지선·청화 스님. ⓒ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종단 개혁의 한복판에서... 비구와 비구니의 평등을 외치다

- 1994년 종단 개혁은 무엇을 바꾼 사건이었습니까?

"1954년 정화 운동이 일제 청산이었다면, 1994년 종단 개혁은 불교 내부 군부독재 청산이라고 봅니다. 일제 조선사찰령은 해방 후 폐지됐지만, 박정희 정권 시기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되면서 국가의 종교 행정 개입 구조가 다른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사 주지는 군청, 본사 주지는 도청, 총무원장은 문화공보부에 '등록'하는 행정 절차를 거쳐야 했고, 사실상 국가가 인사권을 쥔 구조였습니다. 1988년 법이 폐지됐지만 비공식적 유착과 행정 종속 관행은 남아 있었습니다.

1994년 개혁은 국가 통제가 다시 스며들 수 있는 내부 구조를 걷어낸 일이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군부독재 청산 논리를 자기 조직 내부까지 밀어붙인 집단이 불교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총무원장이 정부의 인사·재산 통제에 매이지 않게 되었고, 조계종의 사회적 위상도 높아졌습니다.

아쉬움도 있습니다. 총무원장 직선제가 원안대로 가지 못했고, 비구니의 선거권·피선거권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비구니가 종헌·종법상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대구 은해사의 비구니 본사 전환 같은 제안도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비구니 스님들이 종법 위헌 심판을 청구하면 성평등 원칙에 따라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봅니다."

- 종단 개혁의 성과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까?

"개혁 이후 총무원장의 사회적 위상은 높아졌고 불교가 사회에 발언할 공간도 커졌습니다. 잡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큰 흐름은 발전이었습니다. 다만 이후 자승 체제에서 그 성과가 상당 부분 소진됐다고 봅니다. 법과 제도를 공식적으로 후퇴시킨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사회적 위상과 공적 역할은 약화됐고, 젊은 세대 내부에서 역사적 감각과 사회적 책임 의식이 충분히 이어지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 <[인터뷰 ②] 이재명이라는 선택, 수행자는 왜 그와 함께했나>(https://omn.kr/2ggrr)로 이어집니다.

#효림스님#불교종단개혁#실천불교전국승가회#범종단개혁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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